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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고추


외롭다 말하지 말라
이제 막 수확한
붉은 고추가 온몸을 던져
햇볕을 흡입하고
그 흡입으로 제몸은
쪼그라들고
말라비틀어지는 것을 보았다면

열정을 다 발산하고도
제멋을 잃지 않는
고추의 농염함을 보았다면

그대
외롭대 가슴쓸어내릴 때
붉다 못해 검붉어진
마른 고추의
매운 맛을 기억하라

                            -  시집 [잎들도 이별을 한다] 中에서 -

------------------------------------------------------

이 시를 썼던 때가 아마도 힘든 때였을 게다...
남대문 시장에 나가 상인들의 목청 쉰 소리를 듣고,  
다시 가슴을 피고 돌아서는 데 
낡은 집 옥상에 내건 묽은 고추가 눈에 띄었다.
나는 내 열정을 다 하며 사는 것일까..
나는 내 모든 것을 다 해 도전한 것일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검붉은 고추의 매운 맛이 내 온몸을 다시 일으켰다...




Writer Profile
방미영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작가, 드림엔터기획 대표,  한국방송예술진흥원 겸임교수입니다. 
기자, KBS 구성작가 등 풍부한 현장 경험과 문화예술행정경영 박사 과정의 이론적 토대로
문화예술콘텐츠를 기획, 개발하고 있으며, 이명박대통령을 비롯한 명사들의 자서전 집필로 개인 브랜드를 구축해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집단지성네트워크 40Round와 함께 선진화사회의 주축을 이루고자 합니다. http://artb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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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니스를 하다보면 이러저러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외제차에 명품 가방으로 치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국산 브랜드 차에 명품 하나 걸치지 않고 허름하지만 손맛,  장맛 나는 사람이 있다.

기자 생활을 거처 KBS방송국을 거쳐 사업을 하면서 늘 머리속에 담고 사는 것이 하나 있다.
손맛, 장맛나는 진국 브랜드가 되자!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드림엔터라는 방미영의 브랜드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한지 십여년이 되었다.
이제 어디를 가든지 드림엔터 대표 라는  타이틀이 또다른 내 이름이 되었다.

사업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번듯한 외형이 아니라
허름한 시골집 할머니의 오래묵은 장맛처럼 장인의 맛을 내는 것이다




언제 먹어도 한결 같은 맛을 내는 나만의 비법을 간직하고 있는 브랜드!


집단지성 네트워크 또한, 손맛 장맛 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라 생각된다.
대대손손 전수해줄 수 있는 나만의 비법 하나쯤 있어, 문전성시를 이루는 브랜드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
부족하지만 우리가 함꼐 서로의 손을 잡아주며 가려고 하는 것은 이 손맛, 장맛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의 융성은 외형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천천히 데워지지만 쉽게 식지 않는 뚝배기의 된장 같은 네트워크, 장인의 정성으로 손맛나는 네트워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Writer Profile
방미영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작가, 드림엔터기획 대표,  한국방송예술진흥원 겸임교수입니다. 
기자, KBS 구성작가 등 풍부한 현장 경험과 문화예술행정경영 박사 과정의 이론적 토대로
문화예술콘텐츠를 기획, 개발하고 있으며, 이명박대통령을 비롯한 명사들의 자서전 집필로 개인 브랜드를 구축해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집단지성네트워크 40Round와 함께 선진화사회의 주축을 이루고자 합니다. http://artb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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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금 전달 준비를 하고 있는 방미영대표와 김태진 교수



2009년 9월 10일 세종문화회관 후원회 사무실
The 40  Round 멤버 중  김태균,김태진,김찬,백승휴,방미영,안계환,조연심 이상 7 명이 모인 조찬모임에서 의미있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방미영 드림엔터 대표님이 한 기관을 도와주셨는데 소정의 금일봉을 받으셨다. 혹시 모른다면서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지난 금요일에 나에게 맡겼었는데 오늘 공식적인 자리에서 기꺼이 발전기금으로 기탁한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며 우리 멤버 전체는 이 모임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는 시간이 되었다. 기꺼이 자신이 행한 업무에 대한 댓가로 받은 것을 아무런 조건없이 어딘가에 기탁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행위는 아니기 때문이다.

말로만 하는 기여가 아닌 행동으로 하는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사실  내 책 "여자, 아름다움을 넘어 세상의 중심에 서라"도 판매 수익금의 일부가 사랑의 쌀 나눔운동본부에 기탁된다. 그것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렇게 짧은 시간내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선순환의 가치를 믿는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한 것은 반드시 그 몇 배의 가치를 더해 되돌아온다고 하는 사실을 말이다.

집단지성 네트워크가 앞으로 선한 의도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방미영 대표님이 보여주신 모범적인 사례를 보며 아직도 배우고 가야할 길이 멀긴 하지만 그래도 보고 따라갈 선배님이 계시다는 생각에 힘이 난다.
다시한 번 드림엔터 방미영 대표님께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 포티라운드 멤버를 대표하여 감사를 드린다.


방미영 대표님이 더 포티라운드에 기금을 전달하고 있다. -김태진,김태균,김찬,백승휴,방미영(좌로부터),조연심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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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모 공기업의 트러스전시회 최종 장소로 용산 역사를 선정, 제안해준 적이 있다. 문화콘텐츠가 관객과의 소통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대로 과감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 번도 유동인구로 복잡한 광장 대합실 한복판을 문화의 공간으로 활용한 적이 없었던 담당자는 난색을 표명하며 장소 사용을 불허했다.

그러나 ‘역내 전시라 이동인구의 동선과 시선에 절대 제약을 주지 않게 트러스대 높이를 최대한 낮추고, 동선에 방해되지 않게 전시 작품을 섹션별로 나눠 트러스대와 트러스대 사이의 공간을 최대한 확보할 것이다’ 는 등등 전시 제안서를 들고 설득의 설득을 해 8일간의 전시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테이프커팅식이 있던 날 복지부동의 역내 담당자는 안도의 미소였는지 내내 웃고 있었다. 그리고 전시회가 끝날 즈음 서울역 관계자는 서울역에서 연장전시회를 할 수 없냐며 아쉬움을 표했다. 용산역은 역내 전시를 통해 문화역사라는 또 다른 자긍심을 갖게 되었고, 그 후 자동차 전시 등등 굵직한 문화이벤트 유치로 수익과 문화 양쪽의 키워드를 다 잡을 수 있었다. 이 사례는 현장에서 직접 뛰며 문화를 움직이는 사람과 책상에서 펜으로 문화를 움직이려는 사람과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문화 소통의 성공 사례로 남게 되었다.

문화는 소통이다. 행정적 발상을 가지고 문화를 접근하고 해석한다면 문화 소통을 통한 수요자의 충족을 이룰 수 없다. 문화가 소통 없이 전시행정의 일한으로 밀려난다면 문화산업시대에 세계 속의 한국을 꽃 피울 수 없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영국을 다녀온 사람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리면 공항 벽면 가득히 붙어 있는 웨스트엔드 공연 포스터를 볼 수 있다. 그 광경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문화 소통을 위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노력하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문화강국을 만드는 원동력은 적극적으로 문화소비자를 구애하는 노력일 것이다.




얼마 전 필자는 문화예술행정경영, 문화예술콘텐츠를 전공하는 사람들과 함께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교류하다가 서울이 과연 걷기 편안한 거리인지에 대해 즉석 논의를 했다. 몇 가지 의견들이 오갈 때 덕수궁 앞에서부터 도심문화의 접근성에 대한 체험의 시간을 갖자고 제안해 몇몇이 동행한 적이 있다.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돌아서 정동 길을 걷고 있으니 어디선가 ‘광화문연가’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광화문연가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만난 노래시비 앞에서 짧은 묵도와 함께 가슴이 시원해지도록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정동 길을 돌아 서울시민들 70%의 자발적인 유물기증으로 전시되었다는 역사박물관을 거쳐 서울 수도의 상징인 광화문 네거리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화예술인의 열정과 환희의 무대인 세종문화회관이 최근 주변 공연장들을 연계한 공연예술 특화지구 '세종벨트'를 추진 중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세종문화회관 주변 문화 공간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인 문화의 장이 취약하다는 것에 입을 모았다. 세종벨트가 미국 브로드웨이처럼 '광화문 광장'을 중심으로 세종로에 흩어져 있는 공연장들을 문화 벨트로 묶는다면 각종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 것은 확실하다. 문화는 살아있는 생물이다. 소통하는 모든 대상으로 하여금 발광하고 동참하여 창조하게 한다면 반드시 자연발생적인 문화벨트가 이어질 것이다.




요즈음 대학로나 인사동에서 삼청동과 북촌으로 문화예술축이 옮겨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 미술특구와 삼청동과 가회동의 북촌마을로 이어지는 문화특구가 도심문화벨트의 축을 자연스럽게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보폭에 맞게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갤러리 중심의 문화와, 좁은 길을 따라 형성된 북촌은 올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한국적인 멋을 한껏 담고 있다. 최대한 편안하고 느린 걸음으로 내 안의 모든 것을 들추지 않고도 거리 곳곳에서 만나는 저마다 독특한 문화가 색다른 볼거리를 안겨준다. 더욱이 이탈리아 남부 카프리 섬에서 만난 좁은 골목길을 연상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북촌 길은 도심문화의 백미다. 밀라노와 피렌체에서 느껴보지 못한 카프리 섬의 아름다움이 지금도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듯이, 낯선 나라를 오래 기억하게 하는 것은 문명의 화려함이 아니라 어깨가 스쳐지나갈 정도의 좁은 골목길에 덫 칠해진 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덕수궁 앞에서부터 시작한 도심문화 워킹체험은 가회동 31번지에서 바라본 카메라 앵글 속에서 막을 내렸다. 시간의 덧칠에도 그 모습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문화예술 현장에 있는 우리의 어깨가 저녁노을만큼 무겁게 내려앉았다.



Writer Profile
방미영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작가, 드림엔터기획 대표,  한국방송예술진흥원 겸임교수입니다. 
기자, KBS 구성작가 등 풍부한 현장 경험과 문화예술행정경영 박사 과정의 이론적 토대로
문화예술콘텐츠를 기획, 개발하고 있으며, 이명박대통령을 비롯한 명사들의 자서전 집필로 개인 브랜드를 구축해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집단지성네트워크 40Round와 함께 선진화사회의 주축을 이루고자 합니다.  http://artb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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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랍니다.




사라진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이 사진은 제가 공동대표로 있는 교육선진화운동본부 상임대표이신 김진성 시의원님께서 
지난 8월 미국 콜로라도를 다녀오시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콜로라도주 남쪽에서 북쪽 덴버로 올라오는 지방도로변에 있는 이 표지판은 인근 마을의
6.25참전용사들이 6.25 발발 50주년을 기념해서 세워진 것이라 합니다. 
덴버가 우리나라 개성과 비슷한 위도에 위치하고 있으니 콜로라도주 가운데를 38도선이 가로지르며 지나가고 있는 것이죠.


The Forgotten War

2차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을 겪은 미국인들! 
낯선 나라에 목숨을 바친 미국인들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이 작은 표지판을 보고 있으니까 고개가 숙연해집니다. 

여든 한 살이신 제 아버지도 6.25참전용사이십니다.

당시 영어를 조금하신 관계로, 미군부대 소속 무전병으로 참전하셨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지점령에,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드는데 
무거운 무전기를 매고다녀야 했던 무전병 아버지!
참 용감하셨습니다.


전쟁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시는 아버지는 언제나 상기되십니다.  
저는 아버지 때문이라도  6.25한국전쟁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전우들이 죽어갔는지... 그 대목에서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잠기죠. 

미국이,
참전한 나라의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이 지나는 도로변에 표지판을 세웠는데

우리는 어디에 이런 표지판이 있나요?

내년은 6.25한국전쟁  60주년입니다. 

내년 6.25한국전쟁 60주년에는 전후세대인 젊은이에게 
6.25한국전쟁이 어떻게 발발하게 되었으며,
조국을 위해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바쳤는지,
얼마나 많은 이름모를  낯선 나라의 군인들이,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지,
그들이 목숨을 바치며 지켜낸 자유와 평화가  왜 그토록 소중한 것인지,
6.25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한 내 아버지의 토로처럼 
바르게 알려야 할 것입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있었던 한국전쟁!
우리나라에도 이런 표지판, 세워야 하지 않나요....



Writer Profile
방미영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작가, 드림엔터기획 대표,  한국방송예술진흥원 겸임교수입니다. 
기자, KBS 구성작가 등 풍부한 현장 경험과 문화예술행정경영 박사 과정의 이론적 토대로
문화예술콘텐츠를 기획, 개발하고 있으며, 이명박대통령을 비롯한 명사들의 자서전 집필로 개인 브랜드를 구축해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집단지성네트워크 40Round와 함께 선진화사회의 주축을 이루고자 합니다.  http://artb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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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8 월 31일 매주 월요일  총 15주에 걸쳐 세종에 관한  수많은 스토리들을 들을 수 있는 세종실록 아카데미가 문화1번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강사로는 매회차  특강으로 사회 저명인사 중에서 세종과 관련이 깊은 분들과 실록학교를 운영하고 계신 박현모 박사 (세종처럼 저)님이 매회 세종실록을 기본으로 15C  조선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예정이다.


세종의 리더십과 그의 인간성을 되짚어 보기 위해 시작된 세종실록 아카데미- 세종문화회관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쌓인 들판을 걸을 때라도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어지럽게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지금 내가 내딛는 발자국이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뒤따라오는 이에게는 길이 되나니

                      - 서산대사 -



" 영특하고 문명하면서도 과단성이 있으며 강의하고 신중하면서도 너그러우며 인자하고 공손하고 효성스럽다" 이는 세종의 성격 내지 인품에 대해 북한 사회과학원에서 세종실록에 나온 내용을 번역한 대목이다.  수성(守成)의 시기에 셋째 아들이었던 충녕을 세자로 임명하는 데 근본이 된 왕으로서의 인품을 한마디로 정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요즘 리더들이 본받고 따라야 할 품성의 모범 되겠다.

현 시대에 세종실록을 연구해 세종의 업적과 그의 리더십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세종전도사를 양성하고 계신 박현모 박사님



세종의 실제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으로 시작된 세종실록 아카데미...
우리가 세종이라고 알고 있는 이름은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 중 앞 두 자만 따온 것이고 실제 세종의 성은 이(李)요, 이름은 도(도: 복받을 도라는데 한자검색이 안 됨)이다. 어릴때 이름은 원정이라 한다. 1397년 세종이 태어났을 때는 아버지인 태종이 왕이 아니었으므로 궁궐이 아닌 지금의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근처(당시엔 한양의 준수방이었음)에서 태어났고 조선 건국 후 세대이며 진정한 '서울토박이'인 셈이다.

5월 15일 스승의 날의 유래에 대해 알고 있는가?
이는 1397년 음력 4월 10일생인 세종의 생일을 양력으로 풀어보니 5월 15일이라 해서 겨레의 스승인 세종탄신일을 기려 스승의 날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 숨겨진 스토리를 그 어느 누구도 알려준 사람이 없었다니 아쉽다... 학교 졸업한 지 어언 20년이 다 되가는데...

충녕 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자못 배우기를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외모가 빛나고 언어동작이 두루 예에 부합하였고.....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태종실록 18/06/03>

부왕이었던 태종의 세종에 대한 평가이다. 실로 부모가 자식을 이처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세종을 공부하면서 다시금 훌륭한 사람 뒤에는 그를 알아본 스승이 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데 태종이야말로 세종을 세종답게 만든 장본인 중의 으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가장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가 바로 '중용의 정신'이다. 이를 가장 잘 실천한 이가 바로 세종이다.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둘째아들 효령대군과 한 번 마시면 끝장을 보는 양녕대군 사이에서 적당히 마시고 중간에 그칠 줄 아는 충녕대군의 의지는 현대의 애주가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모습일 듯 하다. 즉 중도의 미덕과 자기 통제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흔히 세종하면 날렵하고 무술도 잘하고 늘씬할 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세종은 육식체질이라 고기가 아니면 수라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세종은 요즘 골프와 비슷한 격구를 즐겨했다. 과일로는 앵두를 좋아했고 전복도 좋아했다고 한다. 세종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지적이고 실리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서운 공부꾼"에다 "실무가적인 성격" 그리고 "예기에도 정통한"  다시 말하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왕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문무를 동시에 중히 여긴 왕이기도 하다.
강무란 조선시대의 국왕들이 직접 주관해서 사냥과 군사훈련을 겸하는 수렵대회인데 말 그대로 왕이 신하들과 작전 계획을 세워 군사들에게 무예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나라 곳곳을 친히 둘러볼 수 있었고 이동동선이 큰 왕 중의 한 분으로 기억된다.
경연이란 문신들과 함께 배우는 궁궐 안의 공부인데 신하들의 토론과정에서 그들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으면서도 간사한 신하들을 멀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강무와 경연을 모두 즐겨한 왕이 바로 대왕 세종인 것이다.

세종대왕의 왕비와 후궁 이야기를 살펴 볼까요?
이씨 왕조의 족보로서 역대 왕들의 왕위계승관계와 내외 자손을 모아 편집한 <선원보략>과  <조선왕조실록>을 기초로 살펴보면 약간 차이가 나긴 하지만 조선 왕조의 왕들의 왕비와 후궁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구 분

태조

정종

태종

세종

성종

연산군

광해군

숙종

영조

정조

선원보략

왕비

2

1

1

1

3

1

1

3

2

1

후궁

0

6

10

5

9

기록무

기록무

3

4

2

합계

2

7

11

6

12

.

.

6

6

3

왕조실록

왕비

2

1

1

1

3

1

1

3

2

1

후궁

6

6

10

8

11

14

10

8

4

4

합계

8

7

11

9

14

15

11

11

6

5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연산군의 여자가 가장 많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겠지요?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전국에서 1만 여명의 미녀를 모아 궁궐 안 7원 3각에 대기하게 하고 그 유명한 흥청악이라는 후궁집단을 만들기도 했다.  특기할 것은 연산군은 후궁들을 세 부류로 분류한 것이다.
1) 지과(地科): 아직 동침하지 않은 후궁
2) 천과(天科): 동침해서 만족을 준 후궁
3)반천과(半天科): 동침했으되 만족을 주지 못한 후궁
술과 여자 그리고 사냥을 즐겨했던 연산군은 결국 재위 12년만에 중종반정을 쫓겨나 강화도 유배지에서 3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세종이 사랑한 여자는 누구였을까?
신빈 김씨라는 여자인데 그녀는 원래 궁궐 내 사용 비품의 출납을 관장하는 내자시라는 관청의 여종이었다. 시어머니인 원경왕후와 며느리인 소헌왕후 모두를 잘 모시던 신빈 김씨는 세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1426년 "성은을 입게"되었고 이후  12년 동안 임신과 출산을 반복해 여섯 아들과 딸 둘을 낳게 된다.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는 자신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을 신빈 김씨에게 맡길 정도로 후궁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는데 세종은 왕비를 질투하지 말고 존경하라고 후궁을 가르쳤으며 불가사의하게도 서로 미워하지 않고 다복하게 살았다는 후문이다.
 

열공중인 세종실록 아카데미 1기생들과 박현모 박사님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나라가 복 받는다는 옛말이 있다. 

태종이 세종인 충녕을 선택한 이유를 보자.
첫째,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무인 가문'이었던 이미지를 벗고 지식인 사회를 이끌 지적 리더십을 겸비한 좋은 후계자의 모습인 것이다.
둘째, 정치의 대체를 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일머리를 안다는 것이다.
셋째, 외교능력이다. 오늘날에도 가장 중요한 역량 중의 하나인데 당시 일년에 2~3회가량 찾아오는 중국 사신을 맞이해야 했던 조정으로서는 적당한 주량과 주법을 갖춘 외교능력을 가진 세자가 절실했던 것이다.
넷째, 안정적 왕위계승자의 존재이다. 한 시대만이 아닌 후대까지도 정책이 계승되고 왕조가 번창하게 할 주역으로 세종을 주목한 것이다.

우리가 나라의 리더나 조직의 리더를 선발할 때 한가지 면만 보고 정할 게 아니라 다각도로 점검해보아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훌륭한 리더를 가려낼 수 있고 그런 훌륭한 리더라야 나라와 조직이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 소유한 것을 어떻게 다루느냐다"


이 말에는 우리가 세종의 리더십을 배우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배워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리더십을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나를 다스리는 제일의 덕목이 바로 리더십이 아닌가 싶다. 가정과 조직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 나부터 건사하는 미덕이 필요한 때이다.

본강의보다 많은 인연을 만드는 뒷풀이...- 백승휴,조연심,방미영,신철식,박현모박사,유영숙 등(좌로부터)


다음 주 강의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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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최불암 선생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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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사회 초년생으로 마포구 신수동 출판단지 내에 있던 월간 [어린이세계]사를 다녔다. [어린이세계]는 상업적 어린이 잡지였던 어깨동무와 비교해 교육적인 콘텐츠를 많이 수록했던  잡지였다.

도서산간벽지까지  학교를 통해 배포되었던 [어린이세계]는  각계 지도층 인터뷰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는 코너가 있었다. 초짜 기자가 인터뷰를 맡는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지만 섭외에서부터 취재, 원고작성, 사진촬영, 편집까지 모두 단독 진행하였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해야하는 우리 스스로를 ""잡기자라고 호칭하며 참 열심히 했다.

당시 최불암 선생은 아마 40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리 당당하게 인터뷰를 한들 불혹을 넘긴 나이에 초짜 기자인줄 눈치챘겠지만 선생은 내게 어설프다는 표정 하나 안짓고 내내 웃음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더더욱 초짜인 내가 들이댄 앵글에도 금방 포즈를 취해주셔서 역시 프로다운 면모를 잃지 않으셨다.. 그 인자한 미소는 아직도 눈 앞에 잔상으로 남아있다.

최불암 선생은 지금도 어린이재단 후원회장을 맡아 하시는 걸로 알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변한다는데 한결같은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인다... 참 아름답다...

후에 나는 잡지사에 게재하려고 방송국 제작과정을 취재하던중 방송국 윗분으로부터 프로포즈를 받았다. 한 1주일쯤 고민한 끝에  "그래 큰물에서 놀자"는 심경으로 잡지사를 떠날 결심을 하고 후에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신 발행인 강인덕 소장님께  사실대로 다 말씀드렸다.
 
발행인께서는  내 이야기를 다 들으시더니  내 눈을 한참 바라보셨다... 그리고 내게  " 방송국이란 만만치가 않네... 그러나 자네는 해낼걸세! 꼭 성공할거야!! 그러나 만일 가서 힘들고,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으면, 아무때라도 다시 오게. 자네 책상은 내가 그대로 둘테니까 "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에 용기를 내어  KBS 교양제작국에 터를 옮겨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며 구성작가 1세대의 획을 그을 수 있었다.

불혹을 훨 넘긴 나이에 만난 이 낡은 사진 한장이 오늘 나를 채찍질 한다.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인의 자리를 지키고 계신  탤런트 최불암 선생님!!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작은 날개짓에도 큰 배려와 용기를 주신  발행인 강인덕 소장님!!

이 두 분처럼 나도 과연 누구의 멘터가 되고 있는가?



Writer Profile
방미영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작가, 드림엔터기획 대표,  한국방송예술진흥원 겸임교수입니다. 
기자, KBS 구성작가 등 풍부한 현장 경험과 문화예술행정경영 박사 과정의 이론적 토대로
문화예술콘텐츠를 기획, 개발하고 있으며, 이명박대통령을 비롯한 명사들의 자서전 집필로 개인 브랜드를 구축해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집단지성네트워크 40Round와 함께 선진화사회의 주축을 이루고자 합니다.  http://artb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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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2007년 7월 12일 신문 지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실렸다.

“시인이자 화가이며 무용평론가인 김영태(金榮泰)씨가 2007년 7월 12일 오전 3시50분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향년 71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1962년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59년 ’사상계’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으며, 대학시절 외국서적 판매점에서 접한 발레 사진집에 매료되면서 1969년 이후에는 무용평론까지 겸해왔다. 미술, 무용, 음악 등 예술 전반에 폭넓게 관여한 시인답게 작품 곳곳에 공연예술ㆍ여행ㆍ미술ㆍ일상사 등을 독특한 풍경으로 연출해놨다. 고인은 ’무용과 결혼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무용을 사랑한 평론가이기도 했다. 암 투병 중에도 지난해 말까지 대학로 공연장을 지킬 정도로 현장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으며 공연예술 월간지 ’객석’ 7월호에 칼럼을 쓰는 등 마지막까지 집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

김영태 선생은 [문학과 지성] 시집의 표지를 그린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고인이 돌아가시기 직전 [자주색 목인]이라는 전시와 출판을 했다. 이 전시는 문화예술계의 주요 인사들의 캐리커처를 그려 징에 에칭해서 전시하는 것으로 소프라노 조수미 등 문인, 화가 ,무용가, 음악인 등의 초상을 담아 그린 전시회였다.

김영태 선생이 그려주신 캐리커처로 징에 새겨 [자주색 목인] 전에 전시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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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지난 6월,  일본 돗토리현에 시찰을 다녀왔다. 돗토리현은 잘 알려진데로 사구 즉, 모래언덕 하나로 관광객 유치에 성공한 곳이다. 이번 시찰은 문화콘텐츠의 개발과 성공 사례를 직접 확인하고 교류하는 차원에서 방문한 것으로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돗토리현은 고 여운계 선생이 마지막 민간 치료를 위해 머물렀던 삼조온천으로 최근 더 유명해졌다. 라듐온천으로 온천물을 먹으면 피부병과 속병을 치료하는데 용이하다는 평판으로 연일 관광객들로 몰려드는 명소였다. 머무는 동안 온천욕으로 그동안 지친 심신을 쉴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화가가 그려준 캐리커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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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자화상이 다른 사람에게 비춰진 지금 현재 내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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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미영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작가, 드림엔터기획 대표,  한국방송예술진흥원 겸임교수입니다. 
기자, KBS 구성작가 등 풍부한 현장 경험과 문화예술행정경영 박사 과정의 이론적 토대로
문화예술콘텐츠를 기획, 개발하고 있으며, 이명박대통령을 비롯한 명사들의 자서전 집필로 개인 브랜드를 구축해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집단지성네트워크 40Round와 함께 선진화사회의 주축을 이루고자 합니다.  http://artb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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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창시절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공통어가 있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성실하며 타의 모범이 됨’, ‘ 품행이방정하며 성실하여 타의 모범이 됨’, ‘능동적이고 성실하며 매사 솔선수범함’... 달동네를 한걸음에 달려가 서른아홉에 쓰러진 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던 것은 우수한 성적이 아니었다. 성적표에 쓰여 진 담임선생님의 생활기록부 문구들이었다. 어머니의 오랜 지병으로 사춘기를 긴 터널 속에서 지내야했지만 사랑으로 똘똘 뭉친 가족들은 “넌 잘할 수 있어!” 라며 꿈과 희망을 노래하게 했다. 역경을 극복하게 하는 것은 사랑과 긍정의 힘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훈련 받아온 셈이다.

2.

어려서 달리기를 잘했다.

초 단위의 기록 경신을 위해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긴장감은 차라리 쾌락이었다. 팀워크도 그 때 알았다. 때로는 뒤로 물러서서, 때로는 앞으로 치고 나가 바통을 줘야 릴레이의 최고 스피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팀플레이의 보이지 않는 규칙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달리기나 체력장의 악착같은 모습 등등으로 체육학교에 진할 할 뻔도 했지만, 기초 체력 부족으로 체육인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운동은 끈기를 갖게 한 좋은 경험이었지만, 평생 직업으로 할 만큼 특별한 재능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스승이 있었기에 시인이 되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내게 멘토가 되어준 선생님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문학소녀의 꿈을 발현해 주신 선생님은 당시 모든 여학생들의 인기를 차지하고 있던 국어선생님이셨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생님은 나를 운동장 한켠에 앉혀놓고 성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내 삶의 무게가 많이 무거워 보였는지 선생님은 문예반 가입을 권유하셨고,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글짓기에서 여러 번 상을 타면서 문학도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시인이 되어 세상과 마주하고 있을 때, 참되고 고결한 선생님의 가르침이 더욱 그리워진다.

4.

뜨거운 심장이 시를 쓰게 했다면, 차가운 머리는 기자가 되게 했다.

라일락꽃보다 더 향기로운 이십 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전국 곳곳을 뛰어다니며 발로 기사를 썼다. 최루탄이 난무하고 민중이 봇물처럼 거리로 뛰어나와 민주화항쟁의 깃발을 높이 치켜든 시절, 그러나 그 무엇으로도 나를 채우지 못했다. 잡지사 기자의 한계는 나를 무력하고 나약하게 했다. 그 무렵, KBS 방송국 프로그램 제작팀에서 합류 권유를 받았다. 새로운 길에 대한 도전으로 일주일쯤 꼬박 고민에 빠졌다가 단호히 내린 결론은 “그래 떠내려가도 좋으니 큰물에 가서 놀자” 였다. 그동안 익숙해진 모든 것들을 털고 그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무지막지한 경쟁의 세계로 선뜻 들어선 것이다.

5.

절대 길을 묻지 않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들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주저거림이 없다. 못해도 해야 하고 몰라도 알아야 한다. 방송국에 처음들어와 그 누구도 프로그램 제작에 대해 코멘트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들은 내가 아마추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프로그램 제작에 합류 제의를 받고 처음 ‘생방송 큐’ 라는 어린이 프로를 맡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큐시트를 써본 일이 없었던지라 기자로서의 펜 솜씨 하나만 믿고 깡다구 있게 들이 민 것이다. 일일이 손으로 큐시트 용지에 대본을 써내려갔던 시절, 사실 큐시트 용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전혀 몰랐다. 하루는 남들이 다 가고 난 후 팀에 남아 있는 큐시트를 죄다 꺼내 읽어나가면서 메모를 시작했다. 큐시트 쓰는 법을 독학으로 공부한 셈이었다. 그 후 생방송을 맡아 첫 대본을 써야했는데, 아뿔싸 대본이 아슬아슬한 시간에 나와 스텝들 모두를 초긴장 상태로 내몰았다. 내 손끝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상태에서 무뎌진 속도는 누군가 “괜찮아” 라는 단 한마디로 다시 필을 받아 날랐다. 다행히 방송 펑크 없이 진행되었지만 앞이 캄캄하고 샛노래져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잘 썼다”는 칭찬으로 잔혹한 경쟁의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고, 강심장도 그 때 얻었다. 지금은 방송작가협회가 생겨 배움의 길들이 열려있지만 1980년대 초 방송작가들은 혼자서 프로그램 아이템 제안, 기획, 출연자 섭외, 대본집필, 편집 등등을 거의 혼자 운영하는 능력을 가진 자들만이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6.

인맥 구성을 위해 투자하다.

이십대 때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전략을 배웠다면 삼십대는 그 전략을 펼칠 수 있는 무대 세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나갔다. 그 일한으로 사단법인 단체에서의 기획실무자로서의 역할은 학문에 정진할 시간과 인맥 네트워크 형성 그리고 문화예술기획자로서의 전문영역을 구축하는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기간이었다.

7.

브랜드가 되다.

“여자지만 사회에 나가 능력을 펼 수 있는 사회인이 되거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어려서부터 귀딱지에 눌러 붙어 있었다. 그 때문인지 브랜드는 늘 첫 번째 화두였다.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큰 산맥에 부딪혀 살아남아야 한다.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자서전, [일기 쓰는 리더] 등등의 저술과 십수년간 문화예술기획 경영의 현장 경험은 차별화된 브랜드 가치를 쌓는 초석이 되었다.

8.

기여를 통한 가치창조의 일원이 되다.

 21세기는 나눔을 통한 브랜드 포지셔닝의 시대다. 최고의 브랜드들이 포진해있는 집단지성 네트워크 40round는 서로에게 아낌없는 전문성을 나눠 그 이상의 고부가가치를 창출해 내는 21세기 팝업비지니스시대에 선택된 모델이다. 꿈을 꾸지 않는 자에게 미래가 없듯이 전문 “문화예술행정경영인”이 되어 문화예술기관의 전문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나의 꿈이며 도전이며 미래다.

9.

두려움이 없는 발광(發光)의 언어로 산에 오르다.

미래는 만들어나는 것이라 했다. 문화예술분야의 오피니언리더로서 집단지성 네트워크 40round와 함께 선진화 사회의 주축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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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미영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작가, 드림엔터기획 대표,  한국방송예술진흥원 겸임교수입니다. 
기자, KBS 구성작가 등 풍부한 현장 경험과 문화예술행정경영 박사 과정의 이론적 토대로
문화예술콘텐츠를 기획, 개발하고 있으며, 이명박대통령을 비롯한 명사들의 자서전 집필로 개인 브랜드를 구축해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집단지성네트워크 40Round와 함께 선진화사회의 주축을 이루고자 합니다.  http://artb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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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기자와 KBS 방송작가를 역임한 나는  진로그룹에서 창간하는 월간  [언론과 비평] 잡지 창간 기자로 합류  제의를 받고 [월간 언론과 비평] 誌 를 창간 하였다. 당시 [언론과 비평]誌는  역사속으로 사라진 [사상계]를 표방하며 사회  여론 정화를 꿈꾸며 야심찬 출발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1990년대 막 들어서는 시점에서의 잡지는 보는 잡지로의 탈바꿈을 시작하였던 떄라 [사상계]를 추구하는 월간 [언론과 비평]의 설 자리는 만만치 않았다.

이화여대 유재천 교수 (현재 상지대 총장 ),  서울대 김경동 교수(현재  KDI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김영석 교수, 연세대 송복 교수 (현재 연대 명예교수), 오택섭교수(현재 KAIST 정보미디어경영대학원), 이민웅(한양대 명예교수) , 서울대 조동성 교수 (현재 한국지속경영학회 회장), 이화여대 진덕규 교수(현재, 이화여대 학술원 원장) 등으로 구성된  편집위원들은 칼날 같은 펜으로 언론의 정의를 부르짖었다.

일선에 선 기자들 또한 언론의 공정성과 정의로 사회의 여론을 형성해간다는 사명감에 언론에 칼을 들이댔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시무시한 상황이었다.  당시 세계 정세는 냉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로,  정치와 언론이 보루로 잡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사회 정의를 주창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그래도 월간 [언론과 비평]은  "우리의 言路를 열고 우리의 眞實을 밝히는 월간 언론문화비평지" 를 케츠프레이즈로 내 걸었었다.

그러나 [사상계]를 표방하던 월간[ 언론과 비평]지는 몇해를 못가 휴간에 들어가는 비운을 맞았다.

당시 독자들의  잡지 구독 추세는  읽는 잡지가 아니라, 보는 잡지로  흐르고 있었다. 이를 인지한 많은 잡지들이 보는 잡지로의 방향 전환을 한데 비해 월간 [언론과 비평]은 기사 위주의 편집방향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편집회의에서 기자들과 데스크 간의 불협화음이 시작되었다. [사상계]처럼 이 사회의 식자층을 이끄는 오피니언리더  잡지가 되는 줄 알았던 데스크와  한 호, 두 호 판매량이 축소되는 위기의 상황을 대처할 수 없었는 기자들은 속이 타들어갔다. 나는 풍전등화에 놓일 잡지의 앞날이 예견되었다.

마케팅!!!   아무리 이야기 해도 과하지 않는 마케팅 전략! 
어느 분야건 마케팅 전략 없이는 시장경제에서 낙오되는 패배만이 있을 뿐이다. 발간 몇해를 못 넘기고 월간 [언론과 비평]은  진로그룹이 출자를 접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후 자생력을 못갖춘 상태에서 휴간이 된 [언론과 비평]!!!  이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잡지이건만 아직도 휴간의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노종호, 황헌식, 조명숙, 박찬호, 백승대, 김수정, 배명애, 변온섭, 윤주헌, 이정무, 심덕보, 김승식 씨 등 데스크와 기자들 그리고  유재천 교수 (현재 상지대 총장 ),  서울대 김경동 교수(현재  KDI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김영석 교수, 연세대 송복 교수 (현재 연대 명예교수), 오택섭교수(현재 KAIST 정보미디어경영대학원), 이민웅(한양대 명예교수) , 서울대 조동성 교수 (현재 한국지속경영학회 회장), 이화여대 진덕규 교수(현재, 이화여대 학술원 원장)  등,   편집위원님들과 함께 다시금 복간을 꿈꾸고 싶다. 특히 집단지성 네트워크 40Round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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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미영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작가, 드림엔터기획 대표,  한국방송예술진흥원 겸임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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