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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버스 역사소설을 읽듯 했다. 동시에 사실에 충실하여 더욱 실감나는 현장에 다녀온 느낌이다. 당대와 후대의 인물이 현장에서 그리고 기록을 통해 바라본 세종은 분명 실록밖으로 행차하여 지금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듯 하다. 덧붙여 ‘내가 바라본 세종과 명신들’을 한편 이어 쓰는 심정으로 후기를 적어본다.


세종은 주어진 소명(숙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최선을 다한 왕이다. 소명이 주어진다는 것은 한편으로 축복이다.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찾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죽은 범부들이 부지기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세종은 주어진 사명을 분명히 인식했다. 권력의 정점에서 휘두르고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역사적 소임을 분명히 인식한 왕이었다. 이에 반해 양녕은 그 ‘주어진’소명‘의 본분을 이해하지도 충실하지도 못한이의 표상이다.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스스로 그 소명을 회피한 것일까? 나에게 주어진 소명의 절실함이 과연 어떠한지를 되물어 볼 일이다.


태종은 ‘정권만 있고 국가는 없던’ 상황에서 아버지의 건국을 돕고 이를 이어받았다. 아니 쟁취해 냈다. 그리고 그는 국가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정리했다. 방법은 2순위였다. 그것이 폭력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내는 것을 국가창업기의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사명은 시간의 굴레속에서 새로운 역할로 창조되는 것이라는 인식을 한 것이리라. 그가 있던 시대의 사명과 오늘날 국가지도자의 사명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된 것은 시대적 소명을 명확히 인지해 내는 것이 최고 지도자의 첫 번째 필요조건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지금 이시대의 지도자의 사명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내가 해야 할 역사속의 소임은 무엇인가를 궁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황희는 ‘선왕이 그에게 넘기신 과업’을 ‘말이 두려워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정리했다. 그는 태종의 생각과 함께 세종의 생각을 분명히 읽었고 그 생각에 충실하고자 했던 명신(名臣)임을 자처했다. 많은 흠결속에서도 훗날 명재상이자 청백리로 거듭나게 된 그에게 세종은 은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은혜를 갚기위해 최선을 다하고 모든 재능을 쏟아 부었다. 조지 버나드쇼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써버리고 가지 못할까 두렵다고 했던 그 두려움을 느끼기나 했을까! 그는 한고조를 세종보다 아래에 두며 그 스스로 세종을 섬김에 깊은 자부심을 가졌다. 그런 류의 자부심을 갖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그는 행복했음에 틀림 없다.


섬김에 있어 최고의 주군을 모신다는 행복감은 특별한 자부심을 가져다 준다. 자신을 알아주고 덮어주는 주군에 대한 보답은 그 스스로 누가 되지 않으며 결국 성공하는 것이다. 자부심 어린 섬김과 역사적 성취를 일구어 낸 행복했던 재상 황희가 오늘 우리시대에는 어떤 표정으로 세상을 바라볼까 궁금하다.



백성을 믿지 않았던 허조. 백성의 억울함을 듣는것과 유능한 관리를 보호하는 것 사이에서 대부분 후자를 선택한 명신.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를 넓힌다(人能弘道)’고 믿었던 사람. 그 때문에 세종치세에는 유능한 인재가 풍부했다. 그는 깐깐하고 원칙주의자였지만 그 때문에 세종의 치세가 가능하도록 주추(풍부한 인재풀)를 놓은 사람이었다. 세상의 평판보다는 본인의 처신을 엄격히 유지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를 바르게 세우는 일(修身)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기본에 충실한 것의 가치를 몸소 실천한 사람으로 결국 ‘선배들의 극기의 공력(克己之功)이 이와 같았다’는 조광조의 평을 듣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넘쳐나는 언로의 홍수속에서 수많은 평판의 회오리속에 살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 회오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어지러움을 경험하고 있다. 능력있는 사람이 사소한 잘못으로 옷을 벗어야 하고 마녀사냥의 제물이 되기도 한다. 우리시대에 허조가 있다면 이런 세간의 언로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게 될까? 스스로 나라의 주인이라 여겼던 그는 국가를 위해 아껴야 할 관료를 등 뒤에 두고 ‘차라리 나를 먼저 죽여라’고 외치며 유능한 관료들의 바람막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국가의 기둥과 서까래들을 지켜온 수문장이다.


세종은 박연에게 말했다. ‘너는 내가 아니었으면 음악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고 나도 네가 아니면 역시 음악을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인가! 완벽한 인간은 없음을, 그래서 서로를 격려하고 담금질하며 결국(結局)을 만들어 내는 관계는 상생을 위한 인간관계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서로의 필요를 알았고 그 필요에 충실했으며 자신을 불태우며 황종음(궁극의 도)을 찾아 냈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고 내가 없으면 너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있는가를 자문해 본다. 누구인가를 물어보아도 시원한 답변이 솟아나질 않는다. 지금부터 자문하기를 계속하여 이런 만남을 꿈꾼다. 내 인생의 행로 속에서 이런 만남을 꿈 꿀 것이다. 모두에게 특별한 희망을 품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지성, 요즘말로 하면 정체성을 중요하게 여긴 정인지는 학자이자 외교관이었다. 학자이기에 독자적 지성의 중요성에 절실했고 외교관이기에 그런 세종의 뜻을 간명하게 파악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흐른 후 따로 모아 이루어 내고 싶은 독립의 생태웅덩이(국가)를 이해한 사람이다. 스스로를 존귀히 여기지 않는 것의 폐해를 분명히 알았기에 훈민정음 창제를 가장 헌신적으로 지원하며 세종정치의 중요한 학문적, 외교적 업적을 뒷받침한다.

국제적 힘의 현실(事大)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잃지 않으려는(自主) 교묘한 균형감각은 근대 우리외교의 전범(典範)이 될 만한 사례이다. 이는 동시에 학문하는 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수많은 외국의 문물이 넘치는 때에 우리 것에 대한 억지스러운 존중으로 체면치레하려는 세태에 학문의 멋들어진 자기(自己)화를 보여준 선비이다.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優), 하늘이 나에게 맡긴 소명을 알고 즐기기에 근심이 없다는 것은 비단 국가중책을 맡은 자들만의 변은 아니다. 민주주의란 개인의 삶에 어느 누구도 예외없는 개별적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조건이 있다. 먼저 지명하는 것이다. 지명(知命)해야 낙천(樂天)이 된다.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 깊은 이해를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을 섬기며 함께 치세를 열어간 수많은 명신(名臣)과 재신(才臣)들은 이웃한 동료들과 군주로 인해 지명(知命)했고 결국 낙천(樂天)으로 마감했다. 이것은 백락과 천리마의 만남과 같은 것이다. 천리마는 이시대의 백락을 만나 맘껏 달리고 싶고 백락은 천리마를 만나 그를 뛰게 하는것이 최고의 보람일 것이다.


백락 세종은 600년을 뛰어넘어 이시대의 천리마를 깨워주시길 바란다.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을 현신한 백락의 상징이라 믿고 싶다. 그 앞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을 제각각의 분야에서 천리마로 변신시키는 불가사의한 힘을 부여하는 그런 실존의 백락으로 믿고 싶다.



Writer Profile
김태균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사람답게 사는것과 행복한 성공을 위해 자신을 찿아가는 여정을 고민함. 내일을 위해 오늘을 성실히 경영해야할 경영자로서 1인기업과 브랜드를 만들 자기경영플래너!
주니어리더십센터 및 미래형커리큘럼연구소 소장, 에너지큐브 이사
저서:지혜의 숲에서 길을 찾다,굿바이 딜레마. http://dreamerchant.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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