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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내내 즐겼던 금강산의 절경을 뒤로 하고 김삿갓은 다시 길을 나섰다.
역마살이 끼어도 단단히 낀 것일까. 김삿갓의 발걸음은 언제나 터벅터벅 그칠 줄 몰랐다.
아름다운 경치나 구슬픈 새소리가 심상을 울려 간혹 그의 발걸음을 쉬게 할 수는 있었으나 정착이란 걸 모르는 김삿갓의 두 다리는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 날도 김삿갓은 작은 산을 하나 넘어 길을 가고 있었다.
어느새 날이 졌는지 산자락 위로 금실 같은 자락만을 남긴 채 해가 지고 있었다.
˝해란 놈도 어디 자러 들어가는구나. 오늘은 어디서 밤이슬을 피할까?˝
먼 하늘을 바라보며 걷던 김삿갓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마침 오솔길 위로 보이는 연기가 민가가 가까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어허! 밥짓는 연기를 보니 회가 동하는구나. 허허허.˝
김삿갓은 자신의 배를 한번 내려다보고 연기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그가 도착한 곳은 마을 서당이었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 그런지 머리 큰 녀석들만 남아 열심히 글을 읽고 있었다.
김삿갓은 글소리에 질세라 목청을 높여 주인을 청했다.
˝뉘시오?˝
김삿갓의 부름에 훈장으로 보이는 한 어른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말 그대로 지나가는 사람이온데 하룻밤 쉬어 갈 곳을 찾고 있습니다.˝
˝흠… 마침 사랑채가 비어 있으니 쉬어 가도 좋소. 그렇지만 단 조건이 있소.˝
김삿갓을 요리조리 뜯어보던 훈장은 그의 용모가 썩 내키지 않았는지 조건을 걸며 그의 청을 수락했다.
김삿갓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훈장의 조건을 물었다.
뻔한 글시험이겠지만 김삿갓에게 그것만큼 자신 있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김삿갓은 아무 실랑이도 못하고 쫓겨나 뒤통수에 대고 비꽈 주는 시 한 수 읊어 주는 것보다 이렇게 대구하는 게 훨씬 재미있었다.

˝에헴. 내가 운을 띄울 터이니 시를 지어 보도록. 잘하면 따뜻한 저녁에 술상이 나가지만 그렇지 못하면…˝
훈장은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뒷말을 흐렸다.
못할 것 같으면 알아서 나가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김삿갓은 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시제를 청했다.

˝멱!˝
˝무슨 멱자이옵니까?˝
˝구할 멱(覓).˝
김삿갓은 빙그레 웃고는 이미 운을 알고 있었다는 듯 바로 시구를 댔다.
˝많고 많은 운자에 하필 멱자를 부르는가? [許多韻字何呼覓]˝
˝다시 멱!˝
훈장은 두 번째로 멱자를 불렀다.
˝첫 번 멱자도 어려웠는데 이번 멱자는 어이 할까? [彼覓有難況此覓]˝
˝또 멱!˝
˝오늘 하룻밤 자고 못자는 운수가 멱자에 걸리었는데 [一夜宿寢懸於覓]˝
˝멱!!˝
훈장은 마지막 멱자에 힘을 주어 운을 띄웠다.
거기에 응답이라도 하듯 김삿갓은 삿갓을 올려 훈장을 쳐다보며 남은 시구를 완성하였다.
˝산촌의 훈장은 멱자 밖에 모르는가. [山村訓長但知覓]˝

훈장의 운이 끝나기 무섭게 흘러나온 시구에 서당의 학동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삿갓을 바라보았다.
학동들이 ˝사멱난관(四覓難關)˝이라 부르는 이 시제를 이렇게 멋있게 넘긴 사람은 김삿갓이 처음이었다.
훈장도 할말을 잃은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정신을 차리고는 머슴을 불러 주안상을 시켰다.
˝어허허. 이런 실례가 많았소이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쉬었다가 가십시오.˝
김삿갓은 그 날 저녁 훈장이 말한 대로 따뜻한 저녁과 술상을 받고 오랜 만에 지붕 아래서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출처:MISOMAIL

ps: 모임에 갔더니 전 KBS청주방송 국장님이셨던 구능회 선생님께서 한 시를 공부하셨는데 그중 김삿갓에 대한 한 시를 읇은 한대목을 소개합니다. 특히 구수한 음성으로 들으니 더욱 맛깔스러웠고 또한 의미가 있는 한 시여서...
40Round에 소개하여 함께 공감하고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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