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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왕이 되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다. 

셋째아들로 태어나 왕이 될 수 있는 순서에 있어서 거의 가망이 없었다.

먼저 세자 양녕이 건재했고(지나친 방탕으로 신임을 잃은것은 폐위 전 2-3년 내의 일이다)

둘째아들 효령이 있었고 거기에 세자 양녕의 아들까지 있었다. 적장자의 순으로 보자면

양녕의 아이가 어리기는 하지만 왕통계승의 차원에서는 논란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순위에서 결국 성실한 자세와 학문하기를 좋아하는 충녕이 세자가 되는 시점은

왕으로 즉위하기 겨우 2달 전이다. 조선의 왕들중에서 가장 왕자수업을 적게 받은 사람에 해당한다.

그리고 왕이되어 즉위교서를 반포하기에 이른다.

 

그 교서의 중심대목에 '시인발정_施仁發政'이란 말을 쓴다.

 

이말은 맹자에 나오는 맹자와 제선왕과의 대화에서 인용한 말이다.

원래 제선왕과 맹자의 대화에는 '발정시인_發政施仁'으로 표현된다.

즉, 정치를 왕성하게 펴서 어짐을 베푼다가 원래 어원이다.

하지만 세종은 어짐을 펴는것을 우선에 두었다.

향후 백성을 근본으로 보는 민본사상의 첫 공식출발인 셈이다.  

위민과 민본은 다르다. 위민은 백성을 위한다는 뜻으로 위하는 사람이 주체이지만

민본은 백성을 근본으로 보아 주체를 백성으로 설정한다.

 

정치를 넓게 펴서 어짐을 베푼다 _ 發政施仁(전통적 정치의 모델)

어짐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킨다 _ 施仁發政(세종식 정치의 출발) 


출발선에 선 세종은 바로 그 차이만큼이나 어짐을 앞세우고 혹독한 시련들을 극복해내며

조선조 최고의 성군으로 첫발은 내 딛는다.

 

<실록원문>

 

임금이 근정전에 나아가 교서를 반포하기를,

 

...영락 16년(1418년 세종 즉위년)8월 초10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위에 나아가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고, 부왕을 상왕으로 높이고 모후를 대비(大妃)로 높이었다.

일체의 제도는 모두 태조와 우리 부왕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할 것이며, 아무런 변경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의례에 부쳐서 마땅히 너그러이 사면하는 영을 선포하노니,

영락 16년 8월 초10일 새벽 이전의 사건은

대역(謀叛大逆)이나 조부모나 부모를 때리거나 죽이거나 한 것과

처첩이 남편을 죽인 것, 노비가 주인을 죽인 것,

독약이나 귀신에게 저주하게 하여 고의로 꾀를 내어 사람을 죽인 것을 제하고,

다만 강도 외에는 이미 발각이 된 것이나 안 된 것이거나 이미 판결된 것이거나 안 된 것이거나,

모두 용서하되, 감히 이 사면(赦免)의 특지를 내리기 이전의 일로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이 사람을 그 죄로 다스릴 것이다.

 

아아, 위(位)를 바로잡고 그 처음을 삼가서, 종사의 소중함을 받들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야 
바야흐로 땀흘려 이루어 주신 은택을 밀어 나아가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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