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라운드 반경남 의장
ROTC 출신 전문 월간잡지 리더스코리아 잡지(현재 리더스월드) 대표로 10년 동안 각종 행사와 인터뷰를 통해 ROTC 출신 45,000 여 명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을 통하면 우리나라 누구라도 만날 수 있고 어떤 일이든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사람입니다. 신장 이식 수술 후 이제 두 살이라고 말하는 반경남 40라운드 의장을 만났습니다. 행복전도사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그와의 행복한 동행을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ROTC와의 인연이 깊은데 대학시절 ROTC를 선택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배재고등학교 2학년까지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던 저는 3학년 때 응원단장을 하면서 성적이 떨어져 지방대인 조선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처음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기대가 크신 만큼 실망도 크셨던 모양입니다.
“용의 꼬리가 되지 말고 뱀의 머리가 되라”시던 아버지의 뜻대로 대학교 1학년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하여 서울에 있는 대학에 편입하는 것으로 하고 저는 조선대 경영학과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는 1980년 5.18 광주사태가 한창인 터라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버지와의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지금도 서울에 있는 대학이 아니고는 취업이 어려운 시대이지만 당시에도 지방대에다 특별한 경험이 없는 경우 대부분 취업을 할 수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취업을 위해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지요. 하나는 경상대 학생회장이 되어 기업은행 특채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ROTC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 성격과 적성을 고려해 선택한 것이 ROTC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대학교 경상대학 학술발표회는 전 학년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데 대부분 학과대표가 3학년들이지만 전 2학년 때 참가해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논문을 대체하여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받은 트로피에 아버지가 맥주를 한 가득 따라 주셨습니다. 아마 그 동안 실망스러웠던 아들에 대한 서운함과 안타까움이 그 일로 인해 다소 풀리셨던 모양입니다. 지금도 그 트로피는 우리 집 가보로 남아 있습니다.
첫 직장은 어떤 곳이었나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은행권 입사는 최고 엘리트 코스의 종착역으로 인식되었던 때지요. 비록 대학은 지방에 있는 조선대지만 학점 3.98에 소위 임관식 때 받은 조선대학교 학군단장상,25사단에 근무할 때 받았던 군단장상을 비롯한 다수의 수상경력으로 인해 전역 무렵 30여 군데의 합격 통지서를 가지고 직장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신한은행, 교보생명, 한전, 삼미특수강 등 여러 분야의 직장 중에서 출퇴근이 확실하고 매출이 급성장하고 있는 삼미특수강을 첫 직장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어머니에게는 30여 군데 동시 합격통보를 받은 자랑스러운 아들의 이미지로 남아 있답니다. 취업 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보다 더 어렵다는 요즘 스펙을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공부나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생들이 많은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나름의 열심이 아닌 남들이 인정할 만큼의 결과를 만드는 것입니다. 졸업생 가운데 몇 등인지, 필요한 자격증은 얼마나 갖추었는지 등 취업 전 사전관리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막연하게 열심이만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직장에 취업할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에서는 유능한 인재라면 언제든지 채용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군대시절 상을 많이 받으셨는데 어떤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한 마디로 말하면 인덕이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용장이기 보다는 덕장이었거든요. 소대장 시절 저녁 8시쯤이면 구두와 총기를 닦고 청소를 하는 등 잡다한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10시 정도가 되야 취침점호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중대의 점호 책임자가 되면 편한 체육복으로 갈아 입고 9시부터 바로 취침점호를 명합니다. 쓸데없이 시간을 끌지 않고 부하들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끌어가다 보니 당시 총기사고랑 폭력이 문제되던 군대에서 아무런 사고 없이 소대원들을 이끌어가는 소대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중대장 입장에서 보면 이런 소대장이 모범적이라 생각되었던 모양입니다. 거기다 군대 전역 시 군대에 대한 제안점이나 하고 싶은 말을 쓰는 ‘소원수리’라는 것이 있는데 전역을 하는 중대원들이 제 칭찬을 하였던 거지요. 그런 이유로 대대장이나 사단장상을 수상하게 된 것입니다.
대학교 시절에도 복학한 선배들에게 깎듯이 인사를 잘 하고 다녔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 경영학과 학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그런 경험과 습관이 지금의 막강한 인맥네트워크의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 인생을 바꾼 계기나 사람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2년 전 제 인생을 바꾼 계기가 있었습니다. 1996년 신뢰를 가지고 자금투자를 도와주던 후배 회사가 부도가 나자 M&A 전문가였던 저는 살고 있던 집을 월세로 옮겨 그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돈보다 평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거기다 후배가 와서 당장 8,000만원이 없으면 회사가 부도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시골집에 보내야 할 돈으로 빌려주려 했을 때 제 아내는 단호히 이혼을 요구하였지만 결국 제 뜻대로 그 돈을 후배에게 빌려주었습니다. 몇 달 후 돈은 돌려 받았지만 집에서는 남만 챙기고 가족한테는 무관심한 바보 같은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답니다.
그렇게 바깥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오던 제게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신장에 무리가 생겨 당장 이식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다는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 동안 온갖 세상 일은 다 하는 것처럼 뛰어다니고 다른 사람의 일이라면 내 일보다 더 열심히 살아왔던 저한테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심한 회한과 원망이 생겼습니다. 결국 여동생의 신장이식으로 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서 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 제가 그렇게 도와주던 사람들은 찾아 오지 않았지만 별로 챙겨주지 못했던 사람들이 뜻하지 않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진짜 나를 도와주고 챙겨주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지요.
그 힘든 시간을 견디면서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바로 아내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맹렬히 사회생활을 할 때에는 그런 느낌을 알 수 없었습니다. 긴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결국 내 곁을 지켜준 사람은 바로 언제나 묵묵히 새벽기도를 다니며 나를 위해 기도하던 아내였음을 알게 된 것이죠. 지금은 아내가 내 인생의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결정할 때 아내의 의견을 먼저 물을 정도로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혹 아내 입장에서 보면 아니라고 할 지 모르지만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아내라는 것은 확실한 제 진심이랍니다.
남을 위해 살던 제가 왜 이런 아픈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좌절과 원망을 했었지만 결국 제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음을 인식하고부터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수술 직후와 회복기에 보았던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하여 지금도 충실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 이라 하지요. 선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는 말로 내가 베풀면 그 보답은 자식대라도 반드시 되돌아 온다고 하는 뜻인데 제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는 어머니가 두 분이십니다. 낳아주신 시골 어머니와 길러주신 서울 어머니… 초등학교 6학년 때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왜 그렇게 시골 어머니가 저한테 엄하게 했는지를 그제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제 부모님은 모두 문맹이라 제대로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데 시골에 갔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역에서 시골 어머니가 제게 전해 준 꼬깃꼬깃한 편지가 지금도 가슴 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소리 나는 대로 씌여진 편지에는 “친구들과 사이 좋게 지내라, 네 꿈을 가져라, 장남이 잘해야 동생들도 잘 한다. 형제간에 우애가 제일이다”와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지금도 시골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 때 제 손에 쥐어준 그 편지가 지금의 저를 이끄는 멘토 역할을 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남들과 다른 가정형편 때문에 혹시라도 잘못될 까봐 노심초사하시던 노모의 마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아직도 시골에서 꿋꿋하게 장사를 하고 계시는 시골어머니에게나, 저를 이렇게 키워주신 서울어머니에게나, 사랑하는 아내의 어머니이신 장모님에게나 저는 모두 효자이고 싶고 잘 모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제 새 생명 얻은 지 2년, 새롭게 태어나 새 삶을 살고 있기에 앞으로의 삶은 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베푸는 마음으로, 남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욕심이 많고 능력이 많아도 모든 것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만큼 겸손함을 배웠습니다. 이제는 돈과 사람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고 한다면 서슴지 않고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남이 성공하는 것이 내가 성공하는 길임을 아는 그런 나이가 된 것이지요. 부자의 마음으로 많이 베풀면 결국 더 많이 들어옵니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지요. 즉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같이 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가을서리처럼 엄격히 하라는 말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기본기에 충실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지금도 선배들을 만나면 바뀌지 않은 게 있다고 하는데 작은 가방과 메모지 그리고 기록하는 습관입니다. 거기다 다른 사람의 일을 언제나 자신의 일처럼 A/S 해 주는 것이 바로 반경남이라는 것입니다. 한 땀 한 땀 바늘로 엮어주는 사람이 바로 제 모습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꿈꾸는 삶은 언제든지 반경남이 말하는 것이면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신뢰와 믿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랍니다.
지난 10년 동안 다른 사람을 인터뷰하는 데 익숙해져 있어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게 어색해 하던 반경남 40라운드 의장은 자신이 평생을 간직하던 소중한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내시면서 마지막 순간에 시골어머니를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인터뷰가 끝나자 마음 만큼은 후련하다고 하던 반경남 의장님을 보면서 사람이 참 따뜻하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이런 느낌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 받고 인정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소중한 추억여행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이제 두 살이신 반경남 40라운드 의장님이 평균 나이인 80정도까지 앞으로 78년만 더 건강하게 사시길 마음 속으로 빕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Writer Profile
조연심 집단지성 브랜드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프로가 되게하는 아주 특별한 방법 M리더십, "여자, 아름다움을 넘어 세상의 중심에 서라" 출간. 지식소통 전문가로서 개인브랜드 구축을 위해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식소통전문가로 세상을 움직이는 영향력, 그 중심에 함께 하고 픈 로비스트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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