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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알게 된 박동섭교수님과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책을 읽으며 가르침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중 가르침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고정관념을 잘 설명해주는 부분들을 모아 '가르침의 허상'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다음은 그 허상들 중 40라운드에서 발표했던 첫번째 내용이다

 



흔히 좋은 선생님이란 아는 것이 많고 인격까지 좋으신 분들을 좋은 선생님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많이 여기고 있다. 그러면 식견이 없고 인격수양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좋은 선생님이 되지 못하는 걸까?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은 조언하는 것이다. 제일 어려운 일은 자기가 조언한대로 사는 것이다." 철학자 탈레스의 말이다. 이 철학자의 말처럼 내가 가르친대로 살아야 제대로 된 선생님이라는 생각에 신호등앞에서도 매번 고민하며 건널까 말까 했던 시간들.. 교사이기 때문에 심지어 옷도 원하는 대로입지 못하고 그 모습에 맞추어 살으려 했던 지난 삶을 되돌아 보게 된다. 그렇게 노력했지만 나는 과연 좋은 선생님인가라고 스스로 묻는다면 자신있게 좋은 선생님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

좋은 선생님이란 내가 스스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타자가 칭하는 것이다. 아마도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좋은 선생님, 나쁜 선생님이라고 구분하고 판단하지 않을까?
가르침에 앞서 배움을 알아야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것이다.그럼 배우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배움이란 무엇일까?
농사를 짓던 옛날에는 어린 아이들도 노동에 함께 참여했었다. 그러다가 현 시대에서는 노동하지 않고 바로 소비부터 시작한다. 어린 아이에게 천원이란 돈을 쥐어주면 천원에 해당하는 가치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경험은 아이에게 짜릿한 경험이다. 돈을 내고 무언가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것이 만능처럼 느껴질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거래에 익숙한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게 되면 돈이 없더라도 학생들은 거래를 하게 된다. 수업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그 가치를 얻어야 하는데 수업이 재미없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한 가치를 주지 못하므로 거래라는 입장에서 태만을 택하게 된다. 엎드리거나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하거나 나름의 딴짓으로 수업못하는 교사에게 그 가치를 지불하는것이다
이렇게 거래의 방식으로, 쇼핑의 관점으로 배움을 인식하게되면 원하는대로 되지않을 때 억울하고 힘들어질 수 있다. 게다가 거래 그 이상을 시도하지 않고 배움은 멈춘다
잘 가르치지 못하고 재미없는 교사라고 좋은 선생이 될 수 없는걸까?

여기 <스승은 있다> 에 나온 '장량과 황석공'이야기를 통해 배움의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한나라의 책사였던 장량이라는 장군이 젊은 시절 황석공이라는 노인을 만나 태공망비전이라는 병법을 전수 받을 때의 에피소드이다.

장량이 젊은 시절 병법을 전수받기 위해 황석공을 찾아가 열심히 봉양을 하였다. 오랜동안 봉양을 하며 병법을 전수받기 위해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우연히 길에서 말을 타고 오는 황석공을 만나게 되었다. 황석공은 장량을 발견하자 신고있던 오른쪽 신발을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장량에게 '"주어 신겨"라고 말을 했다. 장량은 스승의 말에 일단 신발을 신겨드렸다.
그리고 나서 다음 번에 또 황석공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황석공이 양쪽 신발을 떨어뜨리고는 또 신을 신기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그래도 꾹 참고 신발을 신겨드렸다. 그리고 나서 황석공은 갑자기 병법을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어찌보면 짧고도 싱거운 이야기인데 어떻게 장량은 병법을 깨닫게 되었을까?
장량은 처음 신발을 떨어뜨린 것을 우연으로 생각했었을 것이다. '뭐 실수로 떨어뜨린거겠지?
두번째는 우연이 아니라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뭐야 이건, 무슨 의미지? ' 그러면서 병법과 신발과의 관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번째 혹시 황석공을 만나게 된다면 장량은 아마도 신발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신발을 떨어뜨릴때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 즉 이런 기다림을 병법에서는 '주저앉음'이라고 한다. 기다림으로 주저앉아 있는 사람은 절대로 상대방에게 선수를 칠 수 없다. 즉 상대방이 먼저 행동해야 반응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장량은 이런 필패구조를 깨달았던 것이다.

황석공이 신발을 떨어뜨린 건 우연일수도 있고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우연이든 아니든 간에 장량이 황석공의 신발을 떨어뜨린 행동을 보고 치매라 여기고 그냥 지나칠수도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장량은 황석공의 행동이 병법과 관계 있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리고 스스로 깨닫게되었다.
장량이 스스로 배움을 원했고 선택한것이다. 스스로 스승에게 뭔가 있을거라고 기대하고 그의 제자가 되어 배우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배움의 주체는 바로 장량 자신. 배우고자 하는 이가 주체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좋은 선생인지 아닌 지 여부는 스스로 제자가 되어야만 알수가 있는 것이다. 연애에서 콩깍지가 씌워진 것처럼 나에게는 좋은 스승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인정 받지 못하는 선생이 나에게는 좋은 스승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야기 인용  : 우치다 타츠루(2012), 스승은 있다. 민들레, pp135~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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