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나를 착하지 못하다 하는 것으로 어찌 죄를 주겠느냐?

我爲不善, 何忍加罪?(아위불선 하인가죄?)


 

조선시대 왕을 비난하는 것은 3족을 멸하는 역모죄에 해당한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역모를 고발하는 것으로 급격한 신분상승을 꿈꾸었고 없는 일도 만들어 내던 시기였다. 더구나 조선초기 왕권과 통치의 안정을 닦아야 할 시기, 임금에 대한 비방발언은 실수로 나왔다 하더라도 엄청난 파장을 초래한다. 이때 조원이라는 사람이

 

 “지금 임금이 착하지 못하여서 이와 같은 수령(守令)을 임용했다.” 라고 하였다. (세종604/04)

 

이것을 난언이라 하는데 이 말을 옆에있던 노비가 듣고 알린다.

이런 고자질이 잘만 성립되면 노비에서 양민으로, 나아가 상당한 재산을 상으로 받기까지 한다. 아마도 이것을 노렸음직 하다.

드디어 살벌한 의금부 등이 임금에게 처벌하기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의금부 제조 및 삼성(三省)에서 계하기를,

조원(曺元)이 비방한 연유를 신문하니, 답하기를, ‘내가 전지(田地) 송사를 하여 관()에서 판결하기를 기다리는데, 수령이 손님을 대하여 술을 마시면서 속히 판결하지 않으므로, 분하고 성이 나서 이 말이 나왔다. ’고 합니다.


 

하지만 세종은 다음과 같이 전지한다.

 

 “다시 묻지 말라. 무지(無知)한 백성이 나를 착하지 못하다 하는 것은 바로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차마 어찌 죄를 주겠느냐. 속히 놓아 보내라.

勿更問之 無知小民以我爲不善, 正如孺子將入於井, 何忍加罪? 其速放歸

(물경문지 무지소민이아위부선, 정여유자장입어정, 하인가죄? 기속방귀)


 

이런 일은 그냥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신하들의 충성경쟁이 시작되고

계속되는 상소(5번이상)로 임금을 욕(?)한 죄인을 벌주기를 요청한다. 집요하다.

그 논리는 주로 후인을 경계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일벌백계하라는 것이다.

 

다시 지신사(비서실장) 곽존중(郭存中)과 다섯 대언(수석비서관들)이 들어와서 아뢰기를,

“주상께서 조원의 무지한 망발을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해서 놓아 주고 논죄하지 말라 하시니 이것은 비록 성상(聖上)의 미덕이시나, 그러나 이와 같은 죄를 논하지 아니하시면 무엇으로 후인을 징계하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6 04/17)


 

세종은 애민의 군주였다.

국가를 혼란하게 하거나 백성을 못살게 하는 비리에 대해서는 과감한 법 집행을 했으나 자신에게 던지는 난언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게 용서한다.

계속되는 신하들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의리에는 그러하나 마음으로는 그러지 못하겠다는 애민의 다스림을 양보하지 않는다. 다시 실록의 기사를 보면

 

육조와 의정부에서 조원을 법대로 처치하여 후인을 경계하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조원의 말이 나에게 누가 미치는 까닭으로 경 등이 다 치죄(治罪)하기를 청하는데 의리에는 진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나를〉 지척(指斥)한 죄로 조원을 죄주는 것은 내 마음으로는 차마 못하겠다. 또 근래에 수재와 한재가 서로 잇달아 백성이 매우 간고(艱苦)한데, 조원이 사는 고을 관원이 이런 간고함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손님과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시면서 전지 소송을 오랫동안 미루고 결단하지 않았으므로, 조원의 말은 이것이 미워서 나온 것이니 경 등은 조원을 죄주기를 청하지 말라.” 하였다(세종6 04/25)


 

그리고 다시 사간원의 상소가 이어진다.

 

우사간 이반(李蟠)·장령 정연(鄭淵)이 교대로 글을 올렸다.

“신 등이 전일에 조원의 불충 불경한 죄를 가지고 상소를 갖추어 아뢰어서 법대로 처단하기를 청하였사오나, 전하께서는 특히 자기를 그르다 한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서 그대로 두고 논죄하지 말게 하시니, 이것은 비록 전하께서 〈만물을〉 포용하시는 큰 도량이시나, 악을 징계하고 후일을 경계하는 뜻에는 섭섭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면서,

“내 어찌 자손 만대의 계책을 하지 않으랴마는, 조원에게 죄주는 것은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이다.”하였다.(세종6 05/01)


 

법을 집행함은 계절의 순환(사시:四時)과 같이 엄정하고 정확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계속되는 신하들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결국 죄주기를 거부하는 세종의 태도는 무엇이 대의를 위한 처벌이고 무엇이 용서의 덕목인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교훈이다. 요즘 종종 회자되는 괘씸죄를 세종은 용납하지 않으셨다.

 

세종처럼…!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죽을 죄에 대하여는 살릴 수 있는 도리를 구하고,
중한 죄에 대하여는 가볍게 할 수 있는 단서를 찾으라


聽死罪則求可生之道, 聽重罪則求可輕之端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는 사람에 대해 족치는일이 주업무인 사헌부(지금의 검찰청)에서
감옥의 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실록원문>


“신들이 간절히 염려하옵는 것은, 옥 중 하루는 마치 1년을 지내는 것 같다 하옵고,

또 한 사람이 옥에 갇혀 있으면 온 집안이 그 때문에 근심과 고통을 겪게 된다 합니다.
그러기에 옥이란 성인(聖人)이 중난하게 다루는 바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반드시 제 몸이 죄악을 범한 사람이라야, 부득이 잡아 옥에 가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선산(善山)에서 갇혀 있는 김제(金制)와 정평(定平)에서 갇혀 있는

두언(豆彦)은 모두 다 그들이 몸소 죄를 범한 자가 아니옵고,

다만 그들의 자식이 죄를 범하고 도망하였기 때문에 그 간 곳을 신문하느라고

여러해 동안 옥에 매어 있으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대저 부모를 생각하고 돌보아 늘 삼가고 경계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군자의 행실이거니와,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야 어찌 부모를 위해 마음을 쓰겠습니까.

또 부모로서야 비록 그 자식이 도망가 있는 곳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의 사이는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지극한 정리일 뿐더러,

나타나기만 하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니, 어찌 차마 고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사정이므로 비록 오래 옥에 가두어 두더라도 일에는 이익이 없을 것이오니,

 

비옵건대 이제부터는 죄를 범하고 도망한 자가 사직에 관계되는 일 이외에는

그 범죄자의 부모나 처자를 잡아다가 고문하더라도 여러 달이 걸리지 않도록 할 것이요,

만일 끝내 범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법률 조문에 의거하여 판결을 내리고

판결문을 작성해 두었다가, 뒷날에 범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죄를 결판하도록 하시와

호생(好生)의 덕()을 넓히시옵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좇았다.(즉위년 8/17)


 

연좌제가 일반이었고 효와 충을 중심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감옥풍경은 살벌하였다.

동시에 환경 또한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옥중에서 병들어 죽고, 지쳐 죽고, 고문받아 죽는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환경에 대한 세종의 관심은 지극한 것이어서 한여름에는

더위를 식히라고 대야에 물을 담아 넣으라는 지시를 직접 하기도 한다.

 

감옥과 죄인에 대한 인식을 대표하는 말씀 한마디!

 

<실록원문>


“옥사(獄事)를 듣는 법은 진실로 마땅히 공평 무사(無私)한 마음으로 공정 명백히 물어야 할 것이며,
죽을 죄에 대하여는 살릴 수 있는 도리를 구할 것이요,
중한 죄에 대하여는 가볍게 할 수 있는 단서(端緖)를 찾을 것이니
,
실정을 살펴 죄를 처단한다 하여도 오히려 실수함이 있거든,
하물며 이제 헌부(憲府)에서는 말이 위에 누()됨이 있다 하여,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실정과 거짓을 잘 살피지 않고 위엄으로써 핍박하여,
죄가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극형(極刑)에 들어가게 하니, 만약 이를 믿고 죄를 처단한다면,
이 어찌 무고(無辜)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이 아니겠느냐.”(실록 4/10/24)


 

 

애민의 시작은 곤란을 겪고 있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시작된다.

결국 어리석은 백성이 제 뜻을 펴지 못함을 불쌍히 여겨한글을 만드심으로 대미를 장식하셨듯이…!

 

세종처럼…!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일에 폐단이 있으면, 그것을 폐지하는 것이 옳다

事之有弊, 除之可也(사지유폐 제지가야)


 

 

왕이 된 자신에게 부여되는 권위와 형식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한다.
즉위한지 3일만이고 만 21세 때의 말이다.

 

임금이 되었다 해도 늘 하던 대로 아버지 태종에게 조석으로 문안인사를 해야 하는데
임금이라는 신분이 번거로운 행사로 변해 버렸다.
대군 시절에는 편안하게 아버지 상왕께 출입하였으나 왕이 된 뒤에는 개인의 문안이 아니라
국가대표 또는 국가 그 자체의 문안이 된 것이다.

바로 옆에서 따르는 갑옷 입은 호위군사,
그들을 이끄는 대장격의 말탄 부장(행수),
그리고 다수의 내시들과 수발하는 사람들이 따르게 되니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닌것이다.
그리고 신하들은 전례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원칙론을 주장하며 예를 갖추겠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은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

일에 폐단이 있으면 폐지하는 것이 옳다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정확히 표현한다.

60넘은 노정승과 갓 20넘은 젊은 왕의 대화가 매우 상징적이다.
예와 절차를 중시하는 보수적 입장과 폐단이 있다면 폐지하자는 젊은 진보청년의 대화처럼….

 

하지만 세종은 유연함의 범위를 자신의 문제로 한정짓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의 전통, 아버지 태종이 세운 정통성을 갖춘 규범 등에 대해서는
불고소폐(不顧小弊:작은 폐는 돌아보지 않는다)하는 대범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종의 방식은 자신의 편리함을 위한 유연함이 아니라
다수의 불편함을 덜 수 있다면 스스로 조금 불편해지거나 단순해지면 된다는 합리성이다.


21
세의 청년 세종은 그렇게 자신의 왕업을 가꾸어간다.

 


<실록원문>

 

임금이 명하기를,

“예를 갖추어 거둥할 때에는 보갑사(步甲士)가 갑옷을 입고, 행수는 거둥 행렬의 맨 앞에서 보행할 것이요, 보통 거둥 때에는 갑사가 평상복의 차림으로 칼을 차고, 행수는 말을 타고 따르게 하라.

하니, 지신사(知申事) 하연 등이 말하기를,

“전례(前例)는 폐지할 수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하루 이틀의 간격으로 상왕전에 문안을 드리는데, 만일 늘 예를 갖춘다면 어찌 폐단이 없겠느냐. 대저 일에 폐단이 있으면, 그것을 폐지하는 것이 옳다.” 고 하였다(즉위년(1418) 8 14)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우의정과 이조·병조의 당상관(堂上官)
함께 의논하여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

予未知人物, 欲與左右議政、吏兵曹堂上, 同議除授


 

오늘(26) 이명박 대통령은 국무위원들이 소관 업무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소통을 강화해야 하고, 청와대는 이를 뒷받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 이같이 말하고청와대는 부처간 엇갈리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고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이 대통령은통합의 근본은 소통이라면서통합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면서 같이 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조선일보 인터넷판 27일자 기사)

 

우리는 지금 소통이란 화두에 몰두하고 있다. 왜 소통이 중요한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소통인지, 소통의 결과로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등을 고민하고 답을 찾고자 한다.

세종은 임금이 된 다음날 의정대신들과 함께 의논하여란 의제를 들고 나왔다. 대신들을 중요한 정치 파트너로서 인정하는 발언이다. 역시 대신들은 환영한다. ‘처음으로 정치를 행하심에 있어 대신들과 의논하는 것은 매우 마땅하다고 한다.

 

누구나 중요한 의제에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길 원한다. 누구나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하고 존중 받는 문화 속에서 자부심이 자란다. 비록 자신의 의견이 채택되지 않더라도 충분한 논의를 통해 수렴되는 과정에 소외되지 않는다는 것 만으로도 효과는 크다.

 

뛰어난 영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제는 집단지성이 세상을 이끌게 될 것이다. 집단지성은 모두가 주인이고 모두가 섬기는 관계로 성장하고 무르익는다. 그리고 리더와 팔로워간의 진정성이 어긋나지 않는한 소통을 기반으로 한 관계의 시너지는 기대 이상의 통합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의논하자는 말이 대신이 아닌 임금의 입에서 먼저 나온 것이
세종의 위대한 치적의 첫 걸음은 아닐까

 


<실록원문>

임금이 하연(河演)에게 이르기를,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우의정과 이조·병조의 당상관(堂上官)과 함께 의논하여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

하니, 하연이 아뢰기를,

“상왕께서 일찍이 경덕궁(景德宮)에서 정승 조준(趙浚) 등과 상서사 제조(尙瑞司提調)와 함께 의논하여, 벼슬을 제수하시었사온데, 이제 전하께서 처음으로 정치를 행하심에 있어, 대신과 함께 의논하옵심은 매우 마땅하옵니다.” 하였다.(세종실록 즉위년 8월 12일)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세종이 왕이 되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다. 

셋째아들로 태어나 왕이 될 수 있는 순서에 있어서 거의 가망이 없었다.

먼저 세자 양녕이 건재했고(지나친 방탕으로 신임을 잃은것은 폐위 전 2-3년 내의 일이다)

둘째아들 효령이 있었고 거기에 세자 양녕의 아들까지 있었다. 적장자의 순으로 보자면

양녕의 아이가 어리기는 하지만 왕통계승의 차원에서는 논란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순위에서 결국 성실한 자세와 학문하기를 좋아하는 충녕이 세자가 되는 시점은

왕으로 즉위하기 겨우 2달 전이다. 조선의 왕들중에서 가장 왕자수업을 적게 받은 사람에 해당한다.

그리고 왕이되어 즉위교서를 반포하기에 이른다.

 

그 교서의 중심대목에 '시인발정_施仁發政'이란 말을 쓴다.

 

이말은 맹자에 나오는 맹자와 제선왕과의 대화에서 인용한 말이다.

원래 제선왕과 맹자의 대화에는 '발정시인_發政施仁'으로 표현된다.

즉, 정치를 왕성하게 펴서 어짐을 베푼다가 원래 어원이다.

하지만 세종은 어짐을 펴는것을 우선에 두었다.

향후 백성을 근본으로 보는 민본사상의 첫 공식출발인 셈이다.  

위민과 민본은 다르다. 위민은 백성을 위한다는 뜻으로 위하는 사람이 주체이지만

민본은 백성을 근본으로 보아 주체를 백성으로 설정한다.

 

정치를 넓게 펴서 어짐을 베푼다 _ 發政施仁(전통적 정치의 모델)

어짐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킨다 _ 施仁發政(세종식 정치의 출발) 


출발선에 선 세종은 바로 그 차이만큼이나 어짐을 앞세우고 혹독한 시련들을 극복해내며

조선조 최고의 성군으로 첫발은 내 딛는다.

 

<실록원문>

 

임금이 근정전에 나아가 교서를 반포하기를,

 

...영락 16년(1418년 세종 즉위년)8월 초10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위에 나아가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고, 부왕을 상왕으로 높이고 모후를 대비(大妃)로 높이었다.

일체의 제도는 모두 태조와 우리 부왕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할 것이며, 아무런 변경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의례에 부쳐서 마땅히 너그러이 사면하는 영을 선포하노니,

영락 16년 8월 초10일 새벽 이전의 사건은

대역(謀叛大逆)이나 조부모나 부모를 때리거나 죽이거나 한 것과

처첩이 남편을 죽인 것, 노비가 주인을 죽인 것,

독약이나 귀신에게 저주하게 하여 고의로 꾀를 내어 사람을 죽인 것을 제하고,

다만 강도 외에는 이미 발각이 된 것이나 안 된 것이거나 이미 판결된 것이거나 안 된 것이거나,

모두 용서하되, 감히 이 사면(赦免)의 특지를 내리기 이전의 일로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이 사람을 그 죄로 다스릴 것이다.

 

아아, 위(位)를 바로잡고 그 처음을 삼가서, 종사의 소중함을 받들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야 
바야흐로 땀흘려 이루어 주신 은택을 밀어 나아가게 되리라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귀한 기회를 주심에 감사하며...그 첫발을 딛습니다.

세종대왕의 묘효와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으로 엄청난 뜻이 담겨있습니다.
굳이 뜻을 풀어적을 필요 있을까요? 쩝~~그래도 참고삼아 알고 넘어가죠

세종은 묘호이고 돌아가신 후 종묘에 신위를 올릴때 일컫는 이름입니다.
장헌~대왕까지는 시호, 즉 그의 행적을 기리고 일생을 평가하기 위해 올린이름입니다.
세종사후 신하들이 올린시호이며 맨 앞의 장헌은 명나라에서 맨 마지막에 내려준 시호입니다.
뜻은 대략 이렇습니다.

'영특하고 문명하면서 과단성이 있고 강하고 신중하고 너그럽고 인자하고 효성스럽다'

그냥 엄친아의 대표격입니다. ㅎㅎ
우리는 그냥 세종대왕으로 부르고 있죠...

간략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397년 5월 15일(음력 4월10일)에 태어나셨습니다. 혹시 생일이 같은분 계시면  축하 함께 하죠..
그리고 1450년 4월8일(음력 2월 17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임금의 위에 있은지 33년차입니다.

대왕을 소개하는 글을 잠간 인용합니다. 기가 팍~~ 죽습니다. 사람일까 싶은데...나름 부족함도 있었습니다.

"어릴적부터 그 용모가 단아하고, 자질이 총명하고
성행이 돈독 근면하여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고
병환이 나서도 한결같이 글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며
한번 눈에 거친글은 다 새겨 잊지 아니하였다.
임금자리에 오른뒤에도 나날이 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는
학문과 궁리, 창조와 경륜에 마음을 쏟아 잠시라도 팔짱을 끼고
한가히 앉아 있는 일이 없었다
나라를 다스리기 서른두해동안에 가지가지의 새로운 빛난 문화를 창조하여
겨레의 생존 발전에 영구히 다함없는 은덕을 길이었다"



위인이라 할 만 합니다. 좀 폼나게 적어 두긴 했지만 얼추 비슷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종께서는 놀기도 잘 하셨습니다.
격구라는 운동(요즘의 자치기와 골프가 결합된듯한)도 즐기고 매사냥도 즐기곤 하셨죠...

그는 우리국가와 민족의 큰바위얼굴입니다.
우리 마을을 구원하고 잘 살게 해줄 현인이 언젠가 오겠지란 전설을 믿고 계속 쳐다보면
우리 스스로가 그를 닮아가는 큰바위얼굴...

그 첫발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집단지성브랜드네트워크 40라운드와 함께 함이 영광이고 기쁨입니다.

세종처럼...!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