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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실록아카데미

 【세종대왕의 창의경영】 강좌안내

 

세종문화회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가 2010년 03월 08일부터 06월 14일까지 15주간 매주 월요일 세종문화회관 세종예술아카데미에서 “세종실록아카데미 - 세종대왕의 창의경영” 강좌가 열립니다.

이번 강좌에서는 특히 세종과 그 시대 인물들이 어떻게 난관을 극복해 나갔는가 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혁신적인 문제해결방식”을 살펴볼 것입니다.(본강 14회) 그리고 13회의 특강 시간에는 세종시대를 폭넓게 배울 수 있는 여러 주제들을 배우게 됩니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 손욱 한국형리더십연구회 회장, 정기용 성균관대 석좌교수가 각각 세종시대를 폭넓게 배울 수 있는 주제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세종실록 아카데미 - 세종대왕의 창의경영」 강좌에 대한 개요 및 커리큘럼을 첨부하여 드리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세종실록아카데미(案)-2010 1학기.hwp

 

 문 의 처 : 전화 02-399-1603, 1606(세종종문화회관 교육사업팀 도준 대리)     

     수강신청 방법  1. 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에 가셔서 수강신청하시고 입급하시면 됩니다

  http://www.sejongpac.or.kr/sejongAca/sub/sub2_2_1_3.asp?iden=121 

                                      ( 무료회원가입- 로그인 필요 )

 

 2. 첨부파일 된  수강신청서 작성하셔서 메일이나 팩스로 보내시고 입금하시면 됩니다.

 E-mail : academy@sejongpac.or.kr    Fax: 02- 399-1519

 수강신청서(접수증).hwp          

 3. 입금은행:   외환은행   630-005595-074     예금주_ (재)세종예술아카데미  

 입금 후 전화로  확인 해 주세요( 02-399-1606/1603)

 4.  무료공개 강좌(2월22일(월))도  전화로 반드시 신청을 하셔야 수강 가능하십니다 

 (선착순 100명 수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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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시대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호연히 홀로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가 미칠 바가 아니다. 주상의 은총을 만나 간()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諫行言聽), 죽어도 한이 없다(세종21년 재상 허조)

 

무엇이 이토록 기쁜 마무리를 할 수 있게 했을까?
신하로서 섬기는 주군에게 죽음을 앞두고 이와 같이 말 할 수 있다는 것은 군신 모두에게 복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결과는 군주와 신하간의 소통(
疏通) 방식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세종이 재위에 오르고 나서 회의시간에 다음과 같은 불만을 내비친다.


아직 과감한 말로 면전에서 쟁간(爭諫)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으며

또 말하는 것이 매우 절실, 강직하지 않다….

중론을 반대하여 논란(論難)하는 자가 없다

 

결국 직언하지 않으며 민감한 사안들을 회피하고 대세추종의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는 의미이다.
선대왕인 태종시대의 엄중함을 겪은 신하들로서는 당연한 분위기일지 몰라도 세종의 이러한 지적은 남다르지 않은가! 편안함을 버리고 올바름을 추구한 것이다.

 


세종은 새로운 회의풍토를 만들기 시작한다.

 

첫째, 자주 불러서 묻고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의논하자’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잘 의논하여 아뢰라라는 말을 세종은 즐겨 사용했다. 때로는 백성을 직접 찾아가서 묻기도 했다. 당시의 군주로서는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하들이 ,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만 읊을 수 없는 상황 아니겠는가! 당연히 자신의 주관과 의견을 지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한 입장정리를 할 만한 공부와 상황파악이 선결되어야 함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것이 더 적극적이고 활발한 토론의 장으로 발전하게 된 배경이다.

 

둘째는 먼저 수긍하고 경청하되 이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 뜻이 좋다’ ‘네 말이 아름답다’ ‘경의 말이 매우 좋다(卿言甚嘉)’와 같이 말한다. 그리고 의견이 다를 때 그러나로 이어지며 자신의 의견을 내 놓는다. 고약해의 강무비판에 대해서도 경의 말이 매우 좋도다. 그러나 강무는 유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세종은 좋은 말을 듣고도 거절하는 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닐 듯 하다. 하지만 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말 한마디만으로도 신하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며 서로를 존중하는 신뢰의 토대를 놓은 것이다.

 

셋째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며 평정심을 유지했다.

사실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왕이 신하들의 면전에서 수시로 화를 내는 것은 매우 큰 약점이 될 수 있다. 역사속에는 가까운 측근들의 배반이 몇 마디 말로 상처를 입어 모반을 키운 예가 얼마든지 있다. 세종은 군신간의 회의 및 토론상황을 유지하고 발전하는 것을 개인의 감정표현보다 우위에 둔 것이 분명하다. ()하는 신하 입장에서 수시로 화를 내며 언로를 막는 군주에게 계속 간언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넷째, 실사구시(實事求是)형 회의를 주도했다.

토론을 위한 토론, 현학의 경쟁으로 흐르기 쉬운 회의를 실행을 위한 결론을 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고전의 인용으로 의논을 만들기도 하고, 이념논쟁을 원천차단하기도 했다. 군신간에 대결국면이 만들어지면 왕에게 세 번 간해서 듣지 않으면 벼슬을 버리고 떠난다(三諫不聽則去)’라는 논어의 구절을 인용해 국면전환을 꾀하거나 무릇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대들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혐의쩍게 여기지 말라라는 위로의 말을 던지기도 했다.

 


이러한 회의를 주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이러한 문제들에 노출되는데 당시의 세종도 마찬가지였던 듯 하다. 형식적인 절차로서의 회의, 너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현학적인 표현만 일삼으며 발언을 독차지 하는 사람, 최고결정권자의 의견에 무조건 동조하려는 태도, 참석자들간의 의견차이로 인한 감정적인 대립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회의를 주재하는 군주의 노력과 지혜는 특별히 중요한 사안이다.

쟁간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적절한 언어를 사용하며 사안에 대한 이해를 돕도록 신하들을 독려하고 또 분위기를 함께 만들어 가는 신하의 말에 힘을 실어주며 반대의견을 경청하는 일관된 모습 등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회의분위기를 통해 조선시대 최고의 회의장면으로 기록된 파저강토벌 대논쟁은 그 결정판이다.


세종즉위 원년의 대마도정벌의 실패사례를 일깨우며 세종 14년 여연지역의 여진족 침범소식에 파저강 토벌 대논쟁은 시작된다.

3단계로 이루어진 토론은 먼저 중국에 보고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재위 14 12 9일부터 21일까지 12일간 이루어지고 결국 중국황제에게 보고할 것를 결정한다.


이후 두번째 논의는 토벌을 실제로 감행할 것인가 란 주제로 재위 151 11일부터 19일까지 9일간 열띤 토론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실질수행자일 수 밖에 없는 최윤덕 장군의 반대를 찬성으로 변화시키고 직접 토벌작전을 주도하도록 힘을 실어 준다.

반대하던 신하가 찬성으로, 그것도 진심으로 돌아서게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에게 모든 임무와 책임을 맡기는 일 또한 특별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벌의 시기와 방법에 대한 토론이 재위 15(1433) 2 15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진다. 이때는 지속적인 반대론자인 허조의 입장을 존중하며 집단적 사고의 위험에 빠지지 않는 점검과 검토의 세밀한 전략을 다루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 파저강 토벌작전은 대승을 거두게 된다. 혹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조선판 갈리아 전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세종식 회의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있었다.


1
원칙 : 충분한 토론(숙의:熟議)과 전적인 일임(전장:專掌)

2원칙 : 토론 중 좋은 의견이 나오면 바로 힘 실어주기(:황희 말대로 하라)

3원칙 : 집단사고로 인한 착각의 함정 피하기(:허조의 비판에 귀 기울여라)

 

참고로 집단사고 또는 집단적 착각이 발생하면 지도자로서 치명적인 결단을 내리게 한다.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는 이유는 집단의 단결력이 강할 경우, 정책결정과정에 소외된 인원이 많을 경우, 사안에 대한 최고의사결정권자의 의지가 강할 경우 집단환상에 사로잡히기 쉽다. 미국의 베트남참전이 좋은 사례로 꼽힌다.

 

이러한 위험을 경계한 인물이 허조이다. ‘말라깽이 송골매 재상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정책의 음지, 예상 문제점, 최악의 경우 등을 조목조목 짚으며 정책의 일괄타결이 가져오는 위험을 방지한 인물이다. 이러한 사람이 끼어있는 회의는 진행하기가 어려워진다. 세종은 허조는 고집불통이야라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중용하며 경청했고 그에게 깊은 신뢰를 보였다. ‘보수와 대쪽의 상징인 허조는 세종시대를 이끄는데 없어서는 안될 명재상이었다. 그 임금에 그 신하라고 할 만한 관계이다.

 

오늘날 세종식 회의를 다음과 같이 구성해본다면 어떨까?

 

의제결정 : 최고결정권자(세종)

아이디어 제공자 3(김종서, 조말생, 최윤덕)

비판자 2(논리적 비판-허조, 감정적 비판-고약해)

요약정리 : 황희

회의내용기록 : 우사관

회의 분위기 등 관찰기록: 좌사관

 

 

 

千歲之致  始於一刻不差  庶績之熙  由於寸陰之無曠

(천세지치 시어일각부차 서적지희 유어촌음지무광)

 

천 년의 긴 세월도 일각의 어긋남 없음에서 비롯되고

모든 공적의 빛남은 촌음을 헛되게 하지 않음에서 말미암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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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8일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일요일 오후 새롭게 복원되고 있는 경복궁에서 세종대왕을 만났습니다. 곳곳에 숨겨져 있던 역사적 진실을 눈으로 보면서 과거 조선시대의 건축과 과학의 우수함을 지금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도 알게되 조금은 씁쓸하면서도 우리 조상에 대한 자랑스러움에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 날 경복궁을 돌며 세종시대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신 분은 세종실록 아카데미의 박현모 박사님이었습니다.

경복궁 전체를 안내해 주는 북궐도를 보며 답사 코스를 알려주고 있는 세종실록아카데미의 박현모 박사님

"혹시 세종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나요?"

경복궁 답사를 시작하기 전의 세종실록아카데미의 학생들



우리가 경복궁 답사를 하는 그 날은 수문장 교대의식이 있는 날이라 TV 사극에서나 보던 광경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색다른 재미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수문장은 도성문과 경복궁 등 국왕이 임어(생활)하는 궁궐의 문을 지키는 책임자로 엄격한 절차에 따라  궁성문을 여닫고 근무를 교대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은 물론 국가의 안위를 수호해 나갔습니다.

수문장교대의식의 절차


가. 초엄(북)이 울리면 , 교대 수문군이 이동을 위한 준비를 완료한다.

나. 중어이 울리면 교대 수문군이 행사장으로 이동한다.
다. 군례를 마치면 출문부, 궤함의 민원사항 등의 당직 업무를 인수인계한다.
라. 삼엄이 울리면 당직 수문군과 교대 수문군이 교대절차를 행하고, 당직 수문군이 수문장의 지휘 하에 퇴장한다.



수문장 교대의식을 알리는 입간판

수문장 교대의식을 거행하고 있는 사람들...



드디어 경복궁 정문을 지나 세종의 숨결이 곳곳에 뭍어나고 있는 왕궁답사를 시작했습니다.

금천교-사사로운 생각을 금한다라는 의미를 지닌 그 곳에서 다리 아래에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박현모 박사님은 물었습니다. "물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가?"고...
동에서 서로 흐른다,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등등 의견이 분분한 우리들을 한마디로 평정하시면서 하신 대답은 바로 "고여 있습니다. 양쪽을 막아 놓았거든요." 그제서야  흐르던 물이 잔잔히 고여있음을 알았고 결국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보고 있음을 다시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금천교 아래에 잔잔히 고여있는 물... 이 금천교를 지나면서 사사로운 생각을 다 버리고 지나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는지를 지켜보는 듯한 사자(?)상이 인상적이다.




경복궁에는 4개의 문이 있는데  각각 동쪽에 건춘문(建春門), 서쪽에 영추문(迎秋門), 남쪽에 광화문 (光化門), 북쪽에 신무문(神武門)입니다. 처음 근정문으로 들어가면서 본 건물은 중국과 같은 거대한 건물은 아니지만 서서히 들어가면서 점차 그 위용이 드러나는 건축기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웅장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금천교를 지나 처음 들어가는 근정문

뒤로 인왕산의 위용과 근정전의 모습이 묘한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근정문을 지키는 수호신

세종실록 아카데미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고 있는 김태균 실장님... 덕분에 단체사진에는 늘 투명인간이다.

천원지방-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모양을 본따 기둥을 받치고 있는 돌을 만들었다.

근정전은 외교 사신이 오거나 손님이 왔을 때 접대하는 정치적인 공간이라 약간은 부담감과 함께 위엄이 느껴진다.



그러나 길게 늘어서있는 기둥사이에 난 작은 문을 나서면 우리나라 나무들로 수목이 된 평안하면서도 따뜻한 공간이 드러납니다. 이곳은 왕궁 식구들을 위한 곳이라서 사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나무 중에서 유독 굵은 허리를 자랑하는 은행나무가 눈에 띄였습니다.
경복궁과 성균관에 유난히 은행나무가 많은 이유는 바로 은행이 유교의 상징적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보리수는 불교를, 올리브와 감나무는 기독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공적인 공간으로 대표되는 근정전을 나오자 사적인 공간이 펼쳐져 있다. 모두 우리나라 나무라 편안한 느낌이다.

가을을 느낄 수 있는 노란 은행잎이 우리를 반긴다.

가끔 퀴즈를 내시며 분위기를 띄우고 계시는 박현모 박사님


든든한 유교의 뿌리를 나타내고 있는 은행나무...

근정전을 지나 편안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경복궁 안을 안내하고 있는 박현모 박사님


수백년은 됨직한 은행나무가 문을 지키고 있다.

대추나무에 숨겨진 뜻이 다산이구나... 그럼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대추나무 아래에서 비는 건가???

우거진 수풀 뒤에 새로 건축한 건물이 보인다.

멀리 인왕산이 보인다.



향원정... 향기가 멀리 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군자의 위풍은 감출수록 불어나고

연꽃의 향기는 감출수록 더 멀리 간다.


소인의 방귀는 감출수록 더 구리다...는 박현모 박사님의 말이 기억이 납니다.



열상진원샘- 열상은 한강의 옛이름이고 진원은 진짜 근원이라는 의미이므로 한강의 진짜 근원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는 경복궁의 물의 근원이기도 하고 조선왕조의 물의 근원이기도 하지요.
고구려의 진원은 아리수, 이는 손이 아리도록 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꺼번에 웃게 만든 이가 바로 김태균실장님이다. 김치대신 헤벌레~~~~~~~~ 하니까 모두 웃는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에서 색을 제한다면 아마 이런 이미지겠지.. 본연의 아름다움, 잔잔한 감동...

흑백사진속의 하늘... 구름, 그리고 나뭇잎의 조화로움... 차 평화롭다.



자경전- 왕의 어머니가 묶는 곳으로 작은 소품이나 벽에 그린 그림만 보아도 섬세하게 신경쓴 모습이 보입니다. 매화,달,새 등 벽화는 부드러움을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나무와 새

매화와 달 그리고 새

꽃과 나비

처마 위의 조각들이 유난히 외로워보인다. 아마도 머물고 있는 분의 외로움이 전해져서이겠지...

이 문의 모양을 보고 외국사람들은 한참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고 한다.



아미산정원은 왕비가 첩들의 군기를 잡던 곳이나 아픔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왕비를 위해 산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심어 놓았다고 한다. 그 정원 위로 보이는 하늘이 유난히 고즈넉하다.


왕비가 궁녀들을 군기잡는 곳이라는데 픙경 하나는 끝내준다... 산을 옮겨 놓았다고 하던데...

하늘의 푸르름이 조선왕조의 숨겨진 아픔으로 와 닿는다. 닫힌 공간에서의 자유란 무엇일까?

투명한 자연스러움을 보며 그 옛날 왕비도 적적함을 달랬겠다.

고즈넉하다는 의미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경회루... 그 위용이 웅장하다.

물,하늘. 그리고 지붕 그 옆을 지키는 경회루... 그 앞에서 과거시험을 보곤 했다는데...

집현전이라 알고 있는 사정전 뒷모습...

버드나무의 굽어진 모습이 우리 역사의 힘겨움으로 다가온다.



세종대왕은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역시 경복궁 곳곳에 남아있는 그 흔적들을 하나하나 파헤쳐가는 현장답사는 세종실록 아카데미의 또다른 묘미가 된 것 같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주말 어느 오후, 경복궁에서의 세종대왕과의 만남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방미영 원장님과 조연심...

참 열심히 공부하는 구나! 마치 세종의 딸들 같구먼... 역시 배움은 좋은 것이여~~~

사정전-제발 생각좀 하고 정치하라는 또다른 의미로 해석을 하니 나름 기억이 나는 곳이다. 여기는 전엔 집현전이었다. 우리의 단체사진의 끝은 바로 여기 사정전 앞이었다. 다들 생각은 하고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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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言)과 일(事)을 엮어내는 ‘경연(經筵)’

회의(會議)는 길어지면 회의(懷疑)가 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그런데 세종은 그 회의(會議)를 창조회의로 승화시킨다. 그 특별한 무대가 경연(經筵)이다. 이곳에서 국정토론을 이끌었다.

경연은 고전(經)을 놓고 공부하며 현안을 풀어가는 독특한 회의(筵)
였다.
국왕은 현명한 신하들에게 배우고 왕은 신하들에게 현안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다.

바로 이곳에서 말과 일이 엮인다.
공부만 하면 이론으로 끝나고 일에 대한 회의만 하면 근본에 대한 성찰이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과 일이 엮이는 회의방식은 바로 이 두가지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세종은 말하는 것에 대해 ‘절실(切實)하고 강직(强直)해야 한다’고 말한다.

절실함은 반드시 필요한 말을 가려 하는 것이고 강직한 말은 분명한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분위기에 편승하여 ‘가만있으면 중간은 간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때 명확한 입장정리는 왕의 판단을 돕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이런 절실 강직함이 경연을 통해 경전(經典)의 이론과 융합(融合)하여 창조(創造)적 일을 추진하는 바탕이 된다.

“어떻게 하면 선비로 하여금 들뜨고 화려한 것(浮華)만 좋아하는 버릇을 버리게 할 수 있을까?”


2. 세종의 통치교과서 ‘대학연의’

맹자의 대학(大學)과 관련한 책은 총 5권이라 한다.

본책 대학(大學), 대학연의(演義), 대한연의부, 대학혹문(惑問), 대학강어(講語)로 알려져 있다.
이중 대학연의는 송나라 진덕수가 대학의 체제에 맞추어 역사적 사례를 덧붙여 살을 입힌 책으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는 치세서(治世書)라 할 수 있다. 너무 유명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말의 원전이 대학이다. 대학연의가 세종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경연에서 3번이나 교재로 활용하며 강독하게 했다.


대학연의는 세종의 정치철학을 담고 있다. 이 가운데 여민동락(與民同樂)이 중심에 있다.
시인발정(施仁發政)이 출발이었다면 그 궁극에 여민동락(與民同樂)이 있는 것이다.


동시에 국가경영의 요체가 압축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라고 태조에게 조준이 건의했다.

그 가운데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국왕의 9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수신(修身) 2. 존현(尊賢) 3. 친친(親親) 4. 경대신(敬大臣) 5. 체군신(體君臣)
6. 자서민(子庶民) 7. 래백공(來百工) 8. 회원인(懷遠人) 9. 회제후(懷諸侯)


또한 세종의 언중유골(言中有骨)은 대학에서 인용하기도 했다.
 
‘들짐승이 아무리 빠져 달아나도 사냥꾼은 반드시 잡고 만다. 그 짐승이 험한 곳으로만 내달리며 넘어져 죽게 될것은 생각지 않으니 지극히 어리석다 이를 수 밖에 없다’ 상왕 태종에게 아부하며 장인인 심온일파를 제거하려는 박은등을 겨냥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초장에서는 의(疑)와 의(義)로 경학에 대한 깊고 옅음을 보고 종장에서는 대책(對策)으로 그 사람의 포부를 본다”-
변계량의 과거시험 방식의 기준

 

3. 그리고 지식경영을 통한 사례들

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왕의 말이 처음 나올때는 실(絲) 같으나 그 말이 외부에 나가면 거문고줄과 같고
임금의 말이 거문고줄과 같으나 그말이 외부에 시행되면 상여줄과 같다.



하나 덧붙인다면

백지보다 나을때 글을 쓰고 침묵보다 나을때 말을 하라.

살벌한 말이로다. ㅎㅎ


여조묘장의(予助苗長矣) - 벼이삭이 빨리자라도록 뽑아주다.

지금 이시대 모든분야에서 조장의 처세가 득세하고 있다. 즉시 즉각 바로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것 같다. 그 중에도 백년대계라 할 교육의 조장(助長)을 염려한다. 현대의 ‘조장교육(助長敎育)’의 염려와 대안에 대해 의논(議論)이 필요하다.


현명한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서 아첨과 칭찬, 직언과 조언을 듣는 방법은 있다.

1.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면책특권(license)을 주라
2. 오직 군주가 하문하는 국정사안에 대해서만 말하라.
3. 군주는 호 불호의 모든사안에 대해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경청(敬聽)하라.
4. 최종판단은 군주가 내려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것을 세종은 실천에 옮겼다.


세종의 순행속 이야기

경남 울주군의 선비와 우연히 만나 응구첩대(應口輒對)한 후 과거에서 낸 답안이 장원을 했다는데 다음과 같다.
내용이 야시시 하다. 이 내용이 진짜로 과거답안인지는 확인불가다.

抱兒私娼弄未休(포아사창농미휴)
半含嬌態半含羞(반함교태반함수)
低聲暗聞相思否(저상암문상사부)
手正金簪小點頭(수정금잠소점두)

님 끌어안고 사창에서 밤새워 즐기는데
부끄러워 고개 떨구며 교태를 부리네
낮은소리 속삭임 서로 주고 받으니
머리끝 금비녀 만지며 미소짓네


임금노릇을 어렵게 여기다.

‘대개 일을 쉽게 여기고 하면 성공하지 못하나 그 일을 어렵게 여겨서 하는 이는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니 너는 그것에 힘쓰라’ 


즉 다스리는 것을 어렵게 여겨 신중하게 하면 성공한다는 말이다.

 然非知之艱 行之惟艱(연비지지간 행지유간)

이를 아는것이 어려움이 아니라 이를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한상경의 직언이 임금태종에게 고맙게 들린다.
결국 세종은 어렵게 하는 정치를 실천했다.


반드시 읽고 외워 마음과 몸에 가두어 두어야 할 어록이 있다.

凡事專治 則無不成(범사전치 즉무불성)

범사에 온 마음을 다해 다스리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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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버스 역사소설을 읽듯 했다. 동시에 사실에 충실하여 더욱 실감나는 현장에 다녀온 느낌이다. 당대와 후대의 인물이 현장에서 그리고 기록을 통해 바라본 세종은 분명 실록밖으로 행차하여 지금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듯 하다. 덧붙여 ‘내가 바라본 세종과 명신들’을 한편 이어 쓰는 심정으로 후기를 적어본다.


세종은 주어진 소명(숙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최선을 다한 왕이다. 소명이 주어진다는 것은 한편으로 축복이다.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찾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죽은 범부들이 부지기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세종은 주어진 사명을 분명히 인식했다. 권력의 정점에서 휘두르고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역사적 소임을 분명히 인식한 왕이었다. 이에 반해 양녕은 그 ‘주어진’소명‘의 본분을 이해하지도 충실하지도 못한이의 표상이다.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스스로 그 소명을 회피한 것일까? 나에게 주어진 소명의 절실함이 과연 어떠한지를 되물어 볼 일이다.


태종은 ‘정권만 있고 국가는 없던’ 상황에서 아버지의 건국을 돕고 이를 이어받았다. 아니 쟁취해 냈다. 그리고 그는 국가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정리했다. 방법은 2순위였다. 그것이 폭력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내는 것을 국가창업기의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사명은 시간의 굴레속에서 새로운 역할로 창조되는 것이라는 인식을 한 것이리라. 그가 있던 시대의 사명과 오늘날 국가지도자의 사명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된 것은 시대적 소명을 명확히 인지해 내는 것이 최고 지도자의 첫 번째 필요조건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지금 이시대의 지도자의 사명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내가 해야 할 역사속의 소임은 무엇인가를 궁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황희는 ‘선왕이 그에게 넘기신 과업’을 ‘말이 두려워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정리했다. 그는 태종의 생각과 함께 세종의 생각을 분명히 읽었고 그 생각에 충실하고자 했던 명신(名臣)임을 자처했다. 많은 흠결속에서도 훗날 명재상이자 청백리로 거듭나게 된 그에게 세종은 은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은혜를 갚기위해 최선을 다하고 모든 재능을 쏟아 부었다. 조지 버나드쇼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써버리고 가지 못할까 두렵다고 했던 그 두려움을 느끼기나 했을까! 그는 한고조를 세종보다 아래에 두며 그 스스로 세종을 섬김에 깊은 자부심을 가졌다. 그런 류의 자부심을 갖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그는 행복했음에 틀림 없다.


섬김에 있어 최고의 주군을 모신다는 행복감은 특별한 자부심을 가져다 준다. 자신을 알아주고 덮어주는 주군에 대한 보답은 그 스스로 누가 되지 않으며 결국 성공하는 것이다. 자부심 어린 섬김과 역사적 성취를 일구어 낸 행복했던 재상 황희가 오늘 우리시대에는 어떤 표정으로 세상을 바라볼까 궁금하다.



백성을 믿지 않았던 허조. 백성의 억울함을 듣는것과 유능한 관리를 보호하는 것 사이에서 대부분 후자를 선택한 명신.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를 넓힌다(人能弘道)’고 믿었던 사람. 그 때문에 세종치세에는 유능한 인재가 풍부했다. 그는 깐깐하고 원칙주의자였지만 그 때문에 세종의 치세가 가능하도록 주추(풍부한 인재풀)를 놓은 사람이었다. 세상의 평판보다는 본인의 처신을 엄격히 유지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를 바르게 세우는 일(修身)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기본에 충실한 것의 가치를 몸소 실천한 사람으로 결국 ‘선배들의 극기의 공력(克己之功)이 이와 같았다’는 조광조의 평을 듣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넘쳐나는 언로의 홍수속에서 수많은 평판의 회오리속에 살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 회오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어지러움을 경험하고 있다. 능력있는 사람이 사소한 잘못으로 옷을 벗어야 하고 마녀사냥의 제물이 되기도 한다. 우리시대에 허조가 있다면 이런 세간의 언로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게 될까? 스스로 나라의 주인이라 여겼던 그는 국가를 위해 아껴야 할 관료를 등 뒤에 두고 ‘차라리 나를 먼저 죽여라’고 외치며 유능한 관료들의 바람막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국가의 기둥과 서까래들을 지켜온 수문장이다.


세종은 박연에게 말했다. ‘너는 내가 아니었으면 음악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고 나도 네가 아니면 역시 음악을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인가! 완벽한 인간은 없음을, 그래서 서로를 격려하고 담금질하며 결국(結局)을 만들어 내는 관계는 상생을 위한 인간관계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서로의 필요를 알았고 그 필요에 충실했으며 자신을 불태우며 황종음(궁극의 도)을 찾아 냈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고 내가 없으면 너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있는가를 자문해 본다. 누구인가를 물어보아도 시원한 답변이 솟아나질 않는다. 지금부터 자문하기를 계속하여 이런 만남을 꿈꾼다. 내 인생의 행로 속에서 이런 만남을 꿈 꿀 것이다. 모두에게 특별한 희망을 품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지성, 요즘말로 하면 정체성을 중요하게 여긴 정인지는 학자이자 외교관이었다. 학자이기에 독자적 지성의 중요성에 절실했고 외교관이기에 그런 세종의 뜻을 간명하게 파악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흐른 후 따로 모아 이루어 내고 싶은 독립의 생태웅덩이(국가)를 이해한 사람이다. 스스로를 존귀히 여기지 않는 것의 폐해를 분명히 알았기에 훈민정음 창제를 가장 헌신적으로 지원하며 세종정치의 중요한 학문적, 외교적 업적을 뒷받침한다.

국제적 힘의 현실(事大)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잃지 않으려는(自主) 교묘한 균형감각은 근대 우리외교의 전범(典範)이 될 만한 사례이다. 이는 동시에 학문하는 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수많은 외국의 문물이 넘치는 때에 우리 것에 대한 억지스러운 존중으로 체면치레하려는 세태에 학문의 멋들어진 자기(自己)화를 보여준 선비이다.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優), 하늘이 나에게 맡긴 소명을 알고 즐기기에 근심이 없다는 것은 비단 국가중책을 맡은 자들만의 변은 아니다. 민주주의란 개인의 삶에 어느 누구도 예외없는 개별적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조건이 있다. 먼저 지명하는 것이다. 지명(知命)해야 낙천(樂天)이 된다.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 깊은 이해를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을 섬기며 함께 치세를 열어간 수많은 명신(名臣)과 재신(才臣)들은 이웃한 동료들과 군주로 인해 지명(知命)했고 결국 낙천(樂天)으로 마감했다. 이것은 백락과 천리마의 만남과 같은 것이다. 천리마는 이시대의 백락을 만나 맘껏 달리고 싶고 백락은 천리마를 만나 그를 뛰게 하는것이 최고의 보람일 것이다.


백락 세종은 600년을 뛰어넘어 이시대의 천리마를 깨워주시길 바란다.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을 현신한 백락의 상징이라 믿고 싶다. 그 앞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을 제각각의 분야에서 천리마로 변신시키는 불가사의한 힘을 부여하는 그런 실존의 백락으로 믿고 싶다.



Writer Profile
김태균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사람답게 사는것과 행복한 성공을 위해 자신을 찿아가는 여정을 고민함. 내일을 위해 오늘을 성실히 경영해야할 경영자로서 1인기업과 브랜드를 만들 자기경영플래너!
주니어리더십센터 및 미래형커리큘럼연구소 소장, 에너지큐브 이사
저서:지혜의 숲에서 길을 찾다,굿바이 딜레마. http://dreamerchant.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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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도자가 인재를 알아보지 못한다.(不知)

먼저 지도자의 옹졸함을 꼽고 싶다. 간장종지는 대접의 크기를 가늠할 수도 없고 대접인지도 모른다. 그저 넉넉한 둥근 벽이 있을 뿐이다. 5척의 신장으로는 5척 이상의 키를 잴 수 없다. 지도자의 도량이 얼마나 넓은가에 따라 대사를 실행하는 인사들의 그릇과 역량이 결정된다.


둘째는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곳에 누가 어떤 방면의 현자가 있는지를 찾는 노력을 지극히 하지 않으면 우연히 걸려드는 인재를 만나기를 기다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많은 그물을 던져 성과가 없더라도 한 두 번의 만선으로 빈 그물을 모두 감당하는 것이다. 권세의 정점에서는 세상과의 소통이 만만치 않다. 특별하고 지극한 노력이 없이는 인의 장막, 말의 커튼에 둘려있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통찰력의 부재를 들고 싶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이익과 이해에 우선한다. 다만 그 이해의 우선순위가 각기 다를 뿐이다. 명예, 재물, 지식, 권력 등 각각의 우선하는 이해속에서 모자이크를 맞추듯,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듯 사람에 대한 통찰력으로 큰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단순히 청렴하다거나 전문성이 있다거나 하는 기계적 척도뿐만 아니라 완성된 인격의 됨됨이를 가늠하고 그것을 업무의 전문성과 합치하게 되는지의 여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지도자는 단편만 보기보다 입체적 사고를 해야한다.


2. 인재를 절실히 찾지 않으며 활용하지 못한다.(不切)


첫째 이유는 사람의 장점을 먼저 보는 긍정의 태도가 부족한 경우다. 거꾸로 단점을 먼저 취하고 그래서 안 된다는 사고로 본다면 세종시대에도 써먹을 인재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단점이란 누구에게나 있고 또 엄밀히 따지만 단점이 아니라 다른 특성일 뿐인 경우가 많다. 자신과 다른 특성을 자신은 옳고 타인은 그르다고 주장하는 것으로는 인재를 모을 수 없다.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일컫는 것일까?


둘째는 전문업무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다. 지도자는 직접 수행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해당 업무의 성격과 목적에 대해 명확한 이해를 해야 한다. 예술기관이니 예술가가 수장이 되어야 하고 체육기관이니 체육인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서로를 이해하는 관점에서는 일견 이해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문제는 수장이 해야하는 것이 예술이나 체육은 아니지 않은가! 경영은 경영의 몫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례처럼 특별한 분야에 특별한 직능을 위주로 편협하게 적용하는 것은 전문역량을 발휘 할 수 없게 만드는 일반적 사례이다.


셋째는 지도자의 그릇이다. 작은 그릇 일수록 큰 그릇을 못 본다. 아니 본다 하더라도 곁에 두고 함께 일할 수 없다. 남들의 시선이 두렵고 자기 스스로 열등감을 느끼는 경우인데 사실 이런 문제가 많지만 역으로 독선도 마찬가지다. 포용하지 못하면서 나는 옳고 그는 그르다고 주장한다. 강직하고 원칙분명하다는 것과 내 그릇이 그보다 작다는 변명과는 종이 한장 차이에 불과한 것 아닌가!


3. 인재가 지도자와 화합하지 못한다(不合)

첫째는 목표가 동일하지 않은 경우이다. 추구하는 바와 가치가 다른 경우 사실 함께 하기 어렵다. 지도자와 현신의 결합은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적 유대보다 목적의식의 공유가 중요하다. 그곳에 함께 가야할 필요를 같이 가져야 한다. 한사람은 가고 싶고 가야 하는데 또 한 사람은 가면 좋지만 안가도 그만이라고 생각한다면 전력을 다한 자기 헌신이 나올 수 없다. 그곳에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함께 계속 길을 가겠는가? 혹 소통의 문제라면 설득하고 대화하고 이해시키며 가치를 새로 설정하고 목적을 공유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방향이 다른 경우라면 극복하기 어렵다.


둘째는 방법론의 차이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그 표현방식과 과정의 방법론에서는 많은 경우의 수가 있기 때문에 의견을 모으기가 힘들다. 그러나 목적이 같다면 이는 대화와 타협이라는 고도의 정치활동으로 2인3각 할 수 있다고 본다. 비록 속도는 느리더라도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협력하면 방법론의 차이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방법의 차이를 인정하고 극복하는 것과 함께 서로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목적지에 함께 다다르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과정에 성실할 것을 신뢰해야 한다. 내 것을 양보하고 내 놓았는데 그것만 똑 따먹고 뒤 돌아 선다면 앞으로는 투쟁만 있고 비난만이 난무하지 않겠는가!


셋째는 조화를 이끌어 내는 지도자의 도량부족이다. 다른 것과 그른것의 차이를 모르는 것이다. 세종은 법가적인 허조, 도가적인 맹사성, 유가의 황희, 불가적인 변계량 등을 모두 함께 끌고 갔다고 한다. 인위(人爲)는 무위(無爲)를 헐뜯고 유가(儒家)는 석가를 공격하면서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三人行 必有我師라 했다. 분명 배울것이 있고 서로를 세울 수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다. 결국 지도자의 조화로운 인재운용은 지도자의 품의 크기이다.


부지(不知), 부절(不切), 불합(不合) 이 3가지 인재를 모으지 못하는 문제의 공통점은 지도자의 자질문제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제도인 직접투표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는 경우 그의 도덕성도 검증해야 하지만 그 품의 넉넉한 수준을 판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평가 기준은 그 주위에 얼마나 좋은 사람들이 오래 머물고 많이 모여드는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수시로 사람들이 바뀌고 물갈이가 되는 것은 그럴 듯 한데 겪어보니 아니라는 반증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국가의 장래는 개인의 장래보다 중요하다. 다수의 문제이고 자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백년대계의 지도자상을 만들어야 한다. 국가를 짊어지고 나갈 세계적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청소년시절부터 인문학을 깊이 있게 접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도입하고 강화해야 한다. 시카고 대학이 3류 대학에서 1류 대학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인문학의 강제적 도입이고 강화였다. 우리는 근래들어 점점 인문학을 약화시키고 응용학문만 성공을 위한 전가의 보도인양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 않았는가!

인문학은 그 자체로 인간에 대한 통찰의 크기와 개인의 도량을 넓혀주는 학문이다. 세종의 어린 시절 지독한 독서의 내용은 대부분 경(經)과 사(史)였을 것이다. 이 경사(經史)는 기본과 응용이라는 두 가지를 모두 아우르며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사색하는 기초가 된다. 이 이해를 토대로 법학, 교육학, 의학, 신문방송학 등의 응용학문이 세워지는 것이 올바른 학문의 순서라고 생각한다.

청소년기에 권하고 싶은 방법이 있다면 독만권서(讀萬券書) 행만리로(行萬里路)의 방법이다. 독서력은 모든 배움에 우선하는 방법이다. 교과서를 외우게 하지 말고 독서력을 강화해야 한다. 정독, 숙독, 지독, 속독 등의 독서 방법과 체계적인 책의 공급등을 제시해야 한다. 동시에 귀로하는 독서인 경청의 필요와 방법 또한 배워야 한다. 이런 기초방법을 숙달 한 뒤에 문사철-정경사-수물화생-기예악의 기초를 닦아나간다면 중고등학교 시절 능히 1천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사색하고 토론한다면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남달라 질것이다.

이에 더해 기회를 자주 만들어 여행을 하게하고 봉사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예술을 접할 기회를 자꾸 만들어야 한다. 점수 따기 위한 눈 가리고 아웅식의 예술 활동이 아니라 클래식위주의 예술을 중심으로 한 활동이다. 클래식은 세월의 풍파를 건너뛰어 살아남은 인류공통의 유산이자 자산이다. 이것은 시공간을 넘어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감대를 쌓아온 것이다. 유행가와는 다르다. 동시에 가족의 가치를 재발견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가족은 언제나 내 편이다. 내가 실수하고 잘못해도 그래야 한다. 그런데 그 가족마저도 어려워진 배우자와 부모를 내버리고 떠나는 세태가 되었다. 지극히 염려스러운 사실이다. 이제는 믿고 의지하며 돌볼 가족마저도 별 볼일 없는 사건 때문에 갈라서는 평범한 관계로 하향 평준화 된 것이다. 위기의 시대이다.

백년대계를 세울 지도자를 위해 오래된 커리큘럼의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 세종께서 그 전형을 보여주셨다.




Writer Profile
김태균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사람답게 사는것과 행복한 성공을 위해 자신을 찿아가는 여정을 고민함. 내일을 위해 오늘을 성실히 경영해야할 경영자로서 1인기업과 브랜드를 만들 자기경영플래너!
주니어리더십센터 및 미래형커리큘럼연구소 소장, 에너지큐브 이사
저서:지혜의 숲에서 길을 찾다,굿바이 딜레마. http://dreamerchant.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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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인재관


"집현전으로 하여금 역대 제왕의 사람을 쓰는 법을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세종실록 18/02/30)



[치평요람]
에 나오는 세종의 인재관은 한마디로 "토포악발(吐哺握髮)"이다.

'토포'는 주공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가 대답을 해야 할 경우 몇 번이고 입에 든 음식을 토해내고 대답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악발'은 주공이 머리를 감고 있다가 인재가 왔다는 말에 감던 머리를 붙잡고 나와 맞이했다는 것으로 인재를 귀히 대하는 자세를 나타내는 성어이다.


율곡 이이
가 말하는 세종의 인재관이다.   

"세종대왕은 사람을 쓰되 자기 몸과 같이 하였다. 현인과 재능 있는 이를 쓰되 그 부류를 따지지 않았다. 임용하고 말을 채택함에 오롯이 하여 참소와 이간질이 들어갈 수 없었다. 또 지위가 그 재능에 합당하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았다. 
  (이이,<율곡전서>2007 )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재를 보석같이 귀하게 여겼다.
둘째, 사람의 신분이 아니라 덕망과 재능을 우선해 인재를 발탁했다.
셋째, 사람을 뽑고 그들의 말을 들을 때 집중해서 들었다.
넷째, 그 사람의 재능이 그 자리에 적합하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았다.


"인재를 불러오는 것(擧賢)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말을 채택하여 쓰는 것(得用)이다"
                                                                             <치평요람>
                   
 
세종의 인재쓰는 법     

첫째, 마음 바탕이 착한가를 살핀다.  
즉 개인보다는 공동체 전체를 우선시하는지의 여부를 살핀다.      

"사람들은 처음에 부지런하다가도 나중에는 게을러지는 경향이 있다. 처음에 열성적으로 일하다가도 끝을 완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처음부터 열을 내지 않는자일까 보냐"  

둘째,집현전과 성균관과 같은 기관에서 인재를 길렀다.
집현전은 세종의 양재용현(養材用賢),즉 인재를 배양하고 등용하는 '인재의 저수지'이다. 

"나무를 심고 길러서 큰 목재를 만들어야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그 분야에 정통한 인재라야 크게 쓸 수 있다.(大用)"          

셋째, 공적으로 허물을 덮게 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단점이 있는데 훌륭한 지도자라면 단점보다는 그의 장점을 발견하고 제 위치에 배치해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해야 한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적합한 자리에 기용해 인재로 키워야 합니다.그리고  전능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적당한 일을 맡겨 능력을 기르는(爲能)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결점만 지적하고 허물만 지적한다면,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는 것(棄短錄長)이 인재를 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데,이렇게 하면 탐욕스런 사람이든 청렴한 사람이든 모두 부릴 수가 있습니다.  (강희맹,<시숙재집> )  
                                                                                                       -  강희맹이 장원급제 한 글이다.                          

강희맹,독조도,지본수묵,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이는 장점경영을 실천한 것인데 대표적인 사례로 조말생 사건이 있다. 이를 자세하게 소개한 책 "세종, 부패사건에 휘말리다"/ 서정민에 보면 세종이 어떻게 장점을 발휘하게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로는 가장 큰 죄에 해당하는 24명의 노비를 증여받은 것과 관련된 김도련 노비소송 사건으로 탄핵된 조말생을 병법과 군사에 대한 지식을 높이 사서 다시 복직시킨 것이다.


"조말생이 논어에 나오는 공자 제자 중에서 자로의 과감성과 자공의 달변을 겸한 인재"라 평하며 충성심과 성실함에서 뛰어나고 능수능란하게 일처리를 잘하는 조말생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그 결과로 조말생은 세종 15년 최윤덕이 서북면 일대의 이만주 일당을 성공적으로 토벌한 '파저가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 것이다.




세종의 싱크탱크 집현전의 비밀

'집현전에 물어보라'  세종시대의 인터넷 지식검색, 집현전

집현전은 오로지 경연을 위하여 두고 경연을 통해 세미나식 국정회의 수준 원했다.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전담하여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는 것이 집현전 학사들의 역할이다.  즉, 집현전의 역할로  이론과 실제를 동시에 겸하는 것을 중히 여겼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곧 지금 서 있는 좌표를 모르는 것과 같고, 또한 장차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함과 같다.

경서를 깊이 연구하는 것은 실용(實用)하기 위한 것이다. 경서와 사기를 궁구하여 다스리는 도리를 차례로 살펴보면, 나라 다스리는 일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워진다.


집현전, 조선 최고의 싱크탱크로 발전 가능했던 이유


조선 최고의 싱크탱크 '집현전'


첫째, 집현전 학사의 구성과 재임기간이 남달랐다.
 전공이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10년 이상 함께 지내면서 긴밀한 토론과 자연스런 교제를 거쳐 서로의 연구에 자극과 도움을 주고 받았다.
둘째, 집현전 학사들은 손쉽게 방대한 자료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집현전은 축적기억장치(ROM)와 임의접근 기억장치(RAM)가 탁월했는데 이는 국내외 문헌들의 총집결처였기에 가능했다. 방대한 자료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분류하는 나름의 방법이 개발되어 신속한 정보 습득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연구와 정책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었다. 연구한 보고서가 대부분 채택되기도 했다.
넷째, 집현전 학사들의 정치적 독립성을 들 수 있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스스로를 세종 개인의 연구집단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싱크탱크로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의 자취를 찾아 역사적으로 검증하고 그 사례에 대한 철저한 검토, 발생할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그리고 그에 대한 충분한 토론과 합의를 거친다면 분명 "대한민국의 집현전"이 만들어질 것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 "사람이 착한 바가 있으면 그 아름다움을 길이 자손에게 미치게 하고, 악한 사실이 있으면 그 미워함은 그 자신에 그치도록 한다." (善善長, 惡惡短) 하였다.                                                                                                 (세종실록 17/03/12)


인재검증장치와 인재보호

과거제도만으로는 적당한 인재를 뽑을 수 없음에 3명씩 천거하도록 하여 풍부한 인력풀을 가동했다.

1) 지모와 용력이 뛰어나서 가히 변방을 지킬만한 자 , 뛰어난 장수
2) 총명하여 가히 수령직에 대비할 수 있는 자 , 공정한 지방관
3) 사무에 능숙하고 두뇌가 명석하여 극히 번거로운 자리에 감당할 수 있는 자, 명석한 사무관

이 제도는 천거를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상벌이 주어졌기에 반응이 미미했다.  그러나 3년마다 인재를 추천하는 법제가 마련되었다.

3단계의 인재검증시스템

1) 이조의 낭관으로 하여금 매우 정밀하게 간택하였다. 경력과 자질, 그리고 부패혐의, 가족관계까지 살피게 하였다.
2)이조 내부의 관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재차 평론에 평론을 거듭했다.
3)이조 밖의 여론을 들어보는 중론 단계를 거쳤다.

사헌부 관리들의 원탁회의 '원의(圓議)'

사헌부 관리들은 풍헌이나 탄핵을 결정할 때, 그리고 배직된 자의 서경을 할 때 '원의'라고 하여 죽 둘러 앉아서 좌우를 물리치고 격렬하게 토론하곤 했다.( 세종실록 28/01/21)

집단지성 네트워크는 이미 세종의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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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Profile
조연심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프로가 되게하는 아주 특별한 방법 M리더십, "여자, 아름다움을 넘어 세상의 중심에 서라" 출간. 지식소통 전문가로서 개인브랜드 구축을 위해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영향력, 그 중심이고 픈 로비스트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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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친정기(親政期)의 시험대  - 기근(饑饉)구제를 통한 위기의 리더십


세종시대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이 임금 때문에 흉년이 들어 살기가 심히 어렵다. 내가 만약 임금이 된다면 반드시 풍년이 들 것이다(세종 5년)’ 강원도 고성의 이각(伊覺)이란 자의 말이다.


흔히 역사속의 태평시대에는 모두 평온했고 전쟁도 없었을 거란 일반의 인식을 뒤엎는 참변이다. 유언비어가 유포되면 곧 정권이 넘어가는 위기의 시대였다. 이러한 위기에서 세종은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하며 치세의 리더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는지가 자못 흥미롭다.


세종 친정기 초반에 굵직한 위기 2가지는 강원도의 기근과 도성의 대화재사건이다.


먼저 기근문제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강원도 인구의 27%인 2600여 호가 유리하여 사라지고 토지가 황폐화되었다. 종자가 썩고, 뿌린 씨앗을 다시 파내 주워 먹어야 했다.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처자식을 버리고 떠나거나 소리치고 울며 따라오는 자식을 나무에 묶어놓고 가기도 하는 비참한 지경에 내 몰렸다. 타 지역으로 먹을 것을 찾아 떠났지만 어느 지역인들 넉넉했을까!


세종은 다음과 같은 대책들을 지시한다.


 첫째는 현지실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었다.

‘흉년을 구제하는 것은 결코 완만히 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정무의 제 1순위에 기근구제의 대책을 강구하는 일에 매달렸다. 이 가운데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실태파악을 괴롭히는 현지 수령방백들의 거짓보고를 엄벌하는 것이다. ‘백성을 위해 창고를 임의로 풀었거나 거둬야 할 곡식을 다 수납하지 못한 것은 지역수령의 관할에서 할 수 있는 일이나 그 형편을 사실대로 전계(보고)하지 아니한 것만큼은 죄를 주어야 한다’는 분명한 입장정리이다. 결국 문제에 대한 상황파악을 1순위로 둔 것은 현상에만 매달리지 않는 장기적인 계획과 대처를 가능하게 하는 첫 관문이라는 인식이 그의 리더십의 출발이다.


둘째는 기민(飢民)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했다.

‘기민들이 대규모로 이동하면 타 지역의 그나마 무사한 지역까지 함께 굶주리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 됐지만 ‘한가한 관원의 불필요한 말’로 강행했다. 하지만 실은 이러한 문제가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떠도는 사람은 많았으나 굶주려 죽는 사람은 적었다’  응급처방과 십시일반의 정신까지 갖춘 방법이다.


셋째는 구휼방식의 변경을 꾀했다.

어디서 왔는지를 묻지 않았고, 구휼(救恤)하는 사람들을 관원에서 승려로 바꾸고 숙소를 마련해 주며 역질에 걸린 사람들을 별도 격리 하는 등의 과감한 조치들을 단행하면서 기근문제를 현장에서 처리하게 했다. 그리고 거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즉 자존감을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여 ‘많은 사람들이 와서 살아나게’되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혁신적인 구제방식의 변경은 강력한 왕의 의지와 충직한 신하들의 협조가 없이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통해 세종은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밥은 백성의 하늘이니(食爲民天) 농사는 늦출 수 없는 것(農事不可緩也)’이라


민생안정을 위해 세제개혁을 단행하여 국가재정을 만회했다. 신세제 도입, 불교종파의 통합과 노비혁파 등의 개혁 외에 국왕가족의 재산을 축소한 일은 특별한 조치로 받아들여진다. 당시 선대왕으로부터 이루어진 가계의 인원수만 해도 대략 80명이 넘는 왕족이 정승(150결)보다 많은 300결의 토지를 분배받았는데 이를 각 50결씩 줄이는 방안을 실행했다. 요즘말로 하면 국왕의 재산헌납이다. 비록 신료들의 반대가 있다 하더라도 왕이 스스로 왕가의 재산을 줄이는 마당에 어찌 저항할 수 있겠는가? 리더의 솔선수범의 전형이다.


이후 간척지 개간 등 농지를 대폭 확대했다. ‘전라도에 황무지가 많더니...호수와 인구가 매우 번성하고 산림과 초목이 우거진 늪이 모두 개간 경작되었다’라는 보고가 올라올 정도로 간척개간의 진척을 많은 효과를 보았다. 특히 함경도 지역의 효과가 커서 국방강화와 함께 많은 유리민들이 모여 정착하게 했다.


조선의 기후 및 토양조건에 맞는 농법개량과 보급 등의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하늘의 재변은 인력으로 어찌 할수 없으나 사람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는 심력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과 수전농법의 발전, 파종시기의 선택을 통해 논농사의 방법을 알게 되었다. 바람에 강한 볍씨의 보급, 구황작물의 식량대용화, 한해 두 번익는 올기장(早麥)의 보급등이 그것이다.


이런 정책의 꾸준한 추진으로 2배의 농지가 늘어나고 2배의 생산성증대를 가져왔다. 결국 4배의 농업생산력을 키운것이다. 밥은 백성의 하늘인데 그 하늘을 편하게 해 준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항은 관리들이 국가시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한 일이다.

기민을 죽게 한자는 비록 공신의 자손이라도 모두 곤장을 쳤으며 돈을 내고 벌을 면제받는 것을 허락지 않는’ 왕의 의지를 표명하는 강제의 방법도 동원했지만 내가 하는 일이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라는 신념을 갖게 해준 세종의 통치리더십이 더욱 큰 빛을 내게 한 것이다.

이디오피아에서 한 어머니가 굶어죽은 아이를 묻으러 가고있다.
우린 너무 풍족하지 않은가!


세종은 자신의 본분에 대해 분명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달성하기 위한 세부목표와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론도 숙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것이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남다른 점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능력이 탁월하다 할 것이다.


세종의 명연설 1 - 왕가의 재산헌납을 제안하며

하늘의 재앙(天災)과 땅의 이변(地異)의 있고 없는 것은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마는 배포조치(配布措置)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다 할수 있는 것이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 큰 기업을 이어받아 능히 치평(治平)을 하지 못해 아래 백성들이 굶어 죽게 되었으니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장차 깊은 못에 떨어질 것만 같다.

자손이 번성하고 많은 것이 경사라고는 하지만 한갓 국록(國祿)을 허비하고 건물이 또한 많아 그 때문에 재앙이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내가 심히 부끄럽다. 그 나머지 종성(宗姓)들의 과전은 갑자기 감할 수 없으므로 친아들 친손자의 과전(科田)을 감하려고 하는데 여러 사람의 뜻은 어떠 한가‘(세종실록 19/01/12)



Writer Profile
김태균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사람답게 사는것과 행복한 성공을 위해 자신을 찿아가는 여정을 고민함. 내일을 위해 오늘을 성실히 경영해야할 경영자로서 1인기업과 브랜드를 만들 자기경영플래너!
주니어리더십센터 및 미래형커리큘럼연구소 소장, 유엔젤문화재단 상임이사.
저서:지혜의 숲에서 길을 찾다,굿바이 딜레마. http://dreamerchant.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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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아카데미 4번째 시간
조선시대 사람들의 하늘과 천문세계에 대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김일권 교수님에게 그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일권 교수님



2009년 문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KBS 2008 책문화대상 빛나는 역작분야 대상후보 선정




하늘을 알면 천하를 얻는다는 진리는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MBC의 선덕여왕을 보면 알 수 있다. 천명공주의 힘이 되고 있는 유신랑(김유신)을 신라에서 몰아내기 위해 과학적인 힘을 이용하여 불상이 솟아오르게 하기도 하고 월식을 예언하기도 하면서 백성과 왕실을 위협하는 미실의 전략은 바로 하늘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하늘은 결국 미실의 편이었다.




하늘이 내려온 운주사 칠성바위와 임실 소충사 28수 의사비

(1) 운주사 칠성바위

운주사가 들어선 만산 계곡의 서쪽 산등성이에 평균지름 2~4m 가량에 두께 20~60cm 정도 되는 일곱 개의 대형 원반 오석(烏石)이 바둑알처럼 하늘의 북두칠성과 거울대칭 모양으로 내려 앉았다.


실제 밝기와 칠성석의 크기를 비교하면 가장 밝고 큰 것이 5번 옥형성이데 S%의 바위 크기의 385cm로 가장 크게 제작되었다. 가장 어두운 3번과 4번 별에 해당하는 별에 해당하는 S3과 S4의 바위가 가장 작게 제작된 점도 주목된다.

언젠가 때가 도래하면 일어나 중생을 구할 것이다...

칠성석에서 만산의 서쪽 산록을 거슬러 올라가면 약 12m의 초대형 와불을 만나게 된다. 이 부처는 누워있지만 실상 누운 부처가 아니라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의 변형으로 여겨지는 두 손 모음 수인에 가부좌를 한 좌상이다.


이 좌상 와불은 오른쪽의 우협시불과 왼쪽의 좌협시불이 동시에 조각되었다가 누군가에 의해 일으켜 세워져 와불 앞 쪽의 일명 머슴미륵(시위불)으로 불리는 입상 불상으로 현존하고 있다. 이를 보면 언젠가 때가 되면 와불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미륵보살로 보인다.



와불의 밑둥에는 누군가 강제로 떼어내려 했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 와불은 황석영의 [장길산]에 등장하면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우리 어머니들은 대부분 뒷뜰에다 정화수를 떠놓고  칠성신에게 소원을 빌어왔다.


















그러나 칠성신은 사후세계를 관정하는 신이다. 우리의 잘못된 지식이 불러온 그릇된 신앙이었던 것이다.

북두칠성은 사후세계를 관장한다




실제로 살아서 잘 살기 위해서는 생(生)을 관장하는 남두육성에게 빌어야 한다.



동서양의 하늘과 천문신화의 차이

태양 중심의 서양 하늘은 주로 신을 믿었고
동양은 일원병행 하늘을 주로 믿어 왔다.

밝을 명(明)은 해(日)와 달(月) 이 합쳐져 있어서 빛을 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반도에는 천문의 놀이라고 하는 윷놀이판이 전국 곳곳에 100여개 이상이 바위 위에 새겨져 있다.

금성산성 윷놀이판 바위그림, 네모가 아닌 둥근 모양이 낯설기만 하다.



조선의 하늘을 수놓은 별자리 "천상열차분야지도"

태조석각본은 1395년에 만들어진 것이고 국보 228호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천문도로 태조 4년 권근,유방택,권중화 등 천문학자 12명이 조선의 건국을 기념하여 당시의 새로운 중성기를 반영하여 오석에 새긴 석각천문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



권근의 천문도지에 의하면 천문도 석본은 옛날 평양성에 있었는데, 병난으로 말미암아 강에 잠겼고 세월이 흘러 인본(印本)또한 없다고 한다. 오직 우리 전하께서 천명을 받은 처음에 어떤 이가 한 권을 올리니 전하께서 보배로 귀중하게 여겨 서운관에 명하여 분명하게 돌에 새기게 하였다.

.. 삼가 생각하건데, 전하께서는 성무인명하셔서 선양으로 나라를 세웠다. 내외가 안연하여 태평하게 된 것은, 즉 요.순의 덕이시며, 먼저 천문을 살피어 중성을 바르게 하신 것은 , 즉 요.순의 정치였다. 그러나 요.순이 상(象)을 보고 그릇을 만드는 마음을 구하면, 그 근본은 다만 공경하는데 있을 뿐이었으니, 전하께서는 또한 공경으로 마음을 가지시고 위로는 천시(天時)를받들며, 아래로는 민사(民事)를 부지런히 하시면, 신성한 공렬이 도한 요.순과 같이 높아질 것인 즉, 하물며 이 그림을 옥돌에 새기어 주시니 길이 자손 만세의 보배로 삼으실 것임이 분명하다. (동문선 제 105권)


과거 우리 조상들은 하늘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면서 그 뜻을 거스리지 않는 삶을 살아왔었다. 그런 연유로 동양의 작은 나라인 한반도가 지금까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의 우리가 하늘을 경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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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아카데미 3- 세종의 정치비전과 민생경영



지난시간 요약


1. 세종이 개인적 취향과 가정관계등에 대한 개요


2. 세종시대가 가능하도록 만든 태종의 길닦기


태종은 2번의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리하며 조선의 3대 왕에 올랐다. 이후 정치적 개혁과 민생개혁을 위해 온 힘을 쏟아 부으며 신생국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온힘을 기울였다.


그 와중에 정적의 숙청과 친인척의 피를 부르는 정리를 하며 오명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이 있었던 것은 태종의 교통정리가 핵심이었다. 양녕에서 충녕(세종)으로 세자변경, 왕권강화를 위한 개국공신 중심의 신권견제와 숙청, 외척세력에 대한 불온가능성 엄단등은 모두 세종치세의 초석이 된 것이다.


몇가지를 요약해 본다.


1. 수성의 시기를 전환하기 위한 왕위계승의 정당성 확립


정종으로 이어지는 世弟(세제)가 아닌 태조로부터 이어지는 世子(세자)로서 왕위를 계승하게 된 점이 그렇다.


2. 국왕재량권의 확보와 국가관의 정립


국가란 여러가문들 중의 하나이거나 나라의 으뜸가문의 차원이 아니라 몇 개의 가문을 희생해서라도 지킬 가치가 있고 때로 왕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다.


사실 고려시대만 해도 국가보다는 부족사회의 연합이란 성격이 강했고 치세의 역량은 무력이었다. 이제 조선에 들어와서 문치와 법치가 바로서는 근대국가의 개념이 정립되게 된다.


不忠(불충)과 不睦(불목)의 차이를 기억하라!


3. 대외적 불안정 요소를 최소화


정치적 정당성을 위한 명나라에 대한 至誠事大(지성사대)이다. 북방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강대국동맹노선을 취한다. 자진한 말1만마리 무역과 조선처녀 공헌, 명나라 사신의 온갖행패등도 모두 신생국가의 안정을 위해 인내력을 발휘한다.


4. 고려의 충신을 襃彰(포창)-아름다운 뜻을 기리고 선행을 드러냄-하여 체제를 공고히 함


고려말 고려충신으로 죽기를 자처했던 길재, 정몽주등을 복권시킨것은 신생국에 대한 절개와 충성을 요구하는 정치적 포석이다.


‘만일 이씨의 신하에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아름다운 일’이라 했다.







세종의 정치비전과 민생경영


1. 세종의 즉위와 정치비전 : 施仁發政(시인발정)- 어짐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킨다.


본디 시인발정이란 맹자와 제선왕의 대화에서 나오는 ‘發政施仁(발정시인)’에서 유래되었다. 세종은 정치가 먼저가 아니라 어짐 베품을 먼저로 본 것이다.


첫째, 선왕의 業(업)을 계승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정치보복 없을것을 천명

둘째, 사면령을 내려 화합을 도모

셋째, 모든 것의 위치를 바로잡고 시작을 조심해서 하겠다는 仁君(인군)정치로의 선언



2. 세종의 제 일성 : 서로 議論(의논)하자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 우의정과 이조 병조의 당상관과 함께 의논하여 벼슬을 제수하려 한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소통을 우선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모든 신하들은 일제히 환영한다. 즉위 후 최초의 말이 의논하자라는 말은 모든 지혜를 수렴해 결정하는 매우 민주적인 운영방식이며 良才用賢(양재용현)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정조의 측위 후 첫마디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했다. 두사람의 정치적 상황을 극명히 보여준다.


결국 세종의 정치적 일성은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동참을 촉구하는 말이자 정치란 혼자할 수 없음을 강조한 말이다.


우리시대 통합을 논하지만 정작 진실된 대화(의논)가 부족한 것은 바로 이런 정치철학의 부재가 불러온 것이 아닐까?



3. 세종의 효행과 태종의 행복


有錢難買子孫賢 억만금으로도 어진 후계자를 살 수 없다’ - 중국사신의 감화발언


‘자식이 왕이되어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니 이와같은 일은 고금에 드문일이다’


‘주상이 현명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뛰어난 줄은 몰랐다. 현명하고 원숙함이 周文王(주문왕)과 같은 사람이다’


‘내가 나라를 부탁해 맡김에 사람을 잘 얻었으니 산수간에 한가로이 노니기를 이처럼 걱정없이 하는 자는 천하에 나 한 사람 뿐이다. 고금을 통틀어 나 한사람 뿐일 것이다’


태종의 세종에 대한 말이다.


지금시대 전임 대통령이 후임대통령에게 이와같은 심사를 표현할 수 있다면 온 국민이 행복하지 않겠는가?


周易(주역)에 樂天知命(낙천지명)이란 말이 있다. 하늘에 감사하고 즐기며 자신의 나아갈 바를 안다는 뜻이다. (원문은  樂天知命故不憂 - 하늘을 즐기고 명을 아니 근심이 없다)


주어진 조건, 상황 등에 감사하며 족한줄을 알고 기뻐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의 命(명)을 안다는 것은 진실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다. 스스로 나아갈 바를 깨닫는일, 천직이라 하는 것, 자신의 직분을 최고로 여기는 자세, 그리고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최선을 다하는 태도는 역사고금을 통틀어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자신의 달란트(재능)를 알고 이를 최선을 다해 기여(남김)하여 복을 받는일과 너무도 같지 않은가!



樂天하고 知命하라.

세종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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