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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시대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호연히 홀로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가 미칠 바가 아니다. 주상의 은총을 만나 간()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諫行言聽), 죽어도 한이 없다(세종21년 재상 허조)

 

무엇이 이토록 기쁜 마무리를 할 수 있게 했을까?
신하로서 섬기는 주군에게 죽음을 앞두고 이와 같이 말 할 수 있다는 것은 군신 모두에게 복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결과는 군주와 신하간의 소통(
疏通) 방식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세종이 재위에 오르고 나서 회의시간에 다음과 같은 불만을 내비친다.


아직 과감한 말로 면전에서 쟁간(爭諫)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으며

또 말하는 것이 매우 절실, 강직하지 않다….

중론을 반대하여 논란(論難)하는 자가 없다

 

결국 직언하지 않으며 민감한 사안들을 회피하고 대세추종의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는 의미이다.
선대왕인 태종시대의 엄중함을 겪은 신하들로서는 당연한 분위기일지 몰라도 세종의 이러한 지적은 남다르지 않은가! 편안함을 버리고 올바름을 추구한 것이다.

 


세종은 새로운 회의풍토를 만들기 시작한다.

 

첫째, 자주 불러서 묻고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의논하자’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잘 의논하여 아뢰라라는 말을 세종은 즐겨 사용했다. 때로는 백성을 직접 찾아가서 묻기도 했다. 당시의 군주로서는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하들이 ,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만 읊을 수 없는 상황 아니겠는가! 당연히 자신의 주관과 의견을 지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한 입장정리를 할 만한 공부와 상황파악이 선결되어야 함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것이 더 적극적이고 활발한 토론의 장으로 발전하게 된 배경이다.

 

둘째는 먼저 수긍하고 경청하되 이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 뜻이 좋다’ ‘네 말이 아름답다’ ‘경의 말이 매우 좋다(卿言甚嘉)’와 같이 말한다. 그리고 의견이 다를 때 그러나로 이어지며 자신의 의견을 내 놓는다. 고약해의 강무비판에 대해서도 경의 말이 매우 좋도다. 그러나 강무는 유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세종은 좋은 말을 듣고도 거절하는 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닐 듯 하다. 하지만 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말 한마디만으로도 신하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며 서로를 존중하는 신뢰의 토대를 놓은 것이다.

 

셋째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며 평정심을 유지했다.

사실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왕이 신하들의 면전에서 수시로 화를 내는 것은 매우 큰 약점이 될 수 있다. 역사속에는 가까운 측근들의 배반이 몇 마디 말로 상처를 입어 모반을 키운 예가 얼마든지 있다. 세종은 군신간의 회의 및 토론상황을 유지하고 발전하는 것을 개인의 감정표현보다 우위에 둔 것이 분명하다. ()하는 신하 입장에서 수시로 화를 내며 언로를 막는 군주에게 계속 간언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넷째, 실사구시(實事求是)형 회의를 주도했다.

토론을 위한 토론, 현학의 경쟁으로 흐르기 쉬운 회의를 실행을 위한 결론을 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고전의 인용으로 의논을 만들기도 하고, 이념논쟁을 원천차단하기도 했다. 군신간에 대결국면이 만들어지면 왕에게 세 번 간해서 듣지 않으면 벼슬을 버리고 떠난다(三諫不聽則去)’라는 논어의 구절을 인용해 국면전환을 꾀하거나 무릇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대들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혐의쩍게 여기지 말라라는 위로의 말을 던지기도 했다.

 


이러한 회의를 주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이러한 문제들에 노출되는데 당시의 세종도 마찬가지였던 듯 하다. 형식적인 절차로서의 회의, 너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현학적인 표현만 일삼으며 발언을 독차지 하는 사람, 최고결정권자의 의견에 무조건 동조하려는 태도, 참석자들간의 의견차이로 인한 감정적인 대립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회의를 주재하는 군주의 노력과 지혜는 특별히 중요한 사안이다.

쟁간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적절한 언어를 사용하며 사안에 대한 이해를 돕도록 신하들을 독려하고 또 분위기를 함께 만들어 가는 신하의 말에 힘을 실어주며 반대의견을 경청하는 일관된 모습 등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회의분위기를 통해 조선시대 최고의 회의장면으로 기록된 파저강토벌 대논쟁은 그 결정판이다.


세종즉위 원년의 대마도정벌의 실패사례를 일깨우며 세종 14년 여연지역의 여진족 침범소식에 파저강 토벌 대논쟁은 시작된다.

3단계로 이루어진 토론은 먼저 중국에 보고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재위 14 12 9일부터 21일까지 12일간 이루어지고 결국 중국황제에게 보고할 것를 결정한다.


이후 두번째 논의는 토벌을 실제로 감행할 것인가 란 주제로 재위 151 11일부터 19일까지 9일간 열띤 토론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실질수행자일 수 밖에 없는 최윤덕 장군의 반대를 찬성으로 변화시키고 직접 토벌작전을 주도하도록 힘을 실어 준다.

반대하던 신하가 찬성으로, 그것도 진심으로 돌아서게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에게 모든 임무와 책임을 맡기는 일 또한 특별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벌의 시기와 방법에 대한 토론이 재위 15(1433) 2 15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진다. 이때는 지속적인 반대론자인 허조의 입장을 존중하며 집단적 사고의 위험에 빠지지 않는 점검과 검토의 세밀한 전략을 다루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 파저강 토벌작전은 대승을 거두게 된다. 혹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조선판 갈리아 전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세종식 회의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있었다.


1
원칙 : 충분한 토론(숙의:熟議)과 전적인 일임(전장:專掌)

2원칙 : 토론 중 좋은 의견이 나오면 바로 힘 실어주기(:황희 말대로 하라)

3원칙 : 집단사고로 인한 착각의 함정 피하기(:허조의 비판에 귀 기울여라)

 

참고로 집단사고 또는 집단적 착각이 발생하면 지도자로서 치명적인 결단을 내리게 한다.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는 이유는 집단의 단결력이 강할 경우, 정책결정과정에 소외된 인원이 많을 경우, 사안에 대한 최고의사결정권자의 의지가 강할 경우 집단환상에 사로잡히기 쉽다. 미국의 베트남참전이 좋은 사례로 꼽힌다.

 

이러한 위험을 경계한 인물이 허조이다. ‘말라깽이 송골매 재상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정책의 음지, 예상 문제점, 최악의 경우 등을 조목조목 짚으며 정책의 일괄타결이 가져오는 위험을 방지한 인물이다. 이러한 사람이 끼어있는 회의는 진행하기가 어려워진다. 세종은 허조는 고집불통이야라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중용하며 경청했고 그에게 깊은 신뢰를 보였다. ‘보수와 대쪽의 상징인 허조는 세종시대를 이끄는데 없어서는 안될 명재상이었다. 그 임금에 그 신하라고 할 만한 관계이다.

 

오늘날 세종식 회의를 다음과 같이 구성해본다면 어떨까?

 

의제결정 : 최고결정권자(세종)

아이디어 제공자 3(김종서, 조말생, 최윤덕)

비판자 2(논리적 비판-허조, 감정적 비판-고약해)

요약정리 : 황희

회의내용기록 : 우사관

회의 분위기 등 관찰기록: 좌사관

 

 

 

千歲之致  始於一刻不差  庶績之熙  由於寸陰之無曠

(천세지치 시어일각부차 서적지희 유어촌음지무광)

 

천 년의 긴 세월도 일각의 어긋남 없음에서 비롯되고

모든 공적의 빛남은 촌음을 헛되게 하지 않음에서 말미암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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