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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를 글귀로만 풀이하는 것은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반드시 마음의 공부가 있어야만 유익할 것이다.(1418(즉위년) /10/12)

세종이 즐겨한 공부법 중에 경연(經筵)이란 것이 있습니다.
경(經) 사서삼경과 같은 고전으로서 중요한 경전을 말하고 연(筵)이란 펴놓은 자리를 뜻합니다. 즉 죽 둘러앉아 서로 책(경전)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같은 책을 읽고 서로 의견을 말하는 독서토론과 같은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1418년, 세종께서 8월 10일에 즉위하여 왕이 된 후 얼마 되지 않은 10월 12일에 다음과 같은 장면의 경연을 갖습니다.

경연에 나아갔다.
경연을 전담하는 신하 이지강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일거 올리고 또 아뢰기를,

“임금의 학문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근본이 되옵나니, 마음이 바른 연후에야 모든 신하들이 바르게 되고, 신하들이 바른 연후에야 모든 백성들이 바르게 되옵는데,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지는 오로지 이 책에 있사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나 경서를 글귀로만 풀이하는 것은 학문에 도움이 없으니, 반드시 마음의 공부가 있어야만 이에 유익할 것이다.” 하였다.



신하는 임금에게 마음을 바르게 할 것을 말하며 그 영향력이 어떠한지에 대해 부연합니다. 그러자 임금은 이에 응답하며 글만 읽고 뜻을 안다고 학문한다 말할 수 없으니 마음공부가 있어야 글 읽고 학문하는 것이 유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하는 이는 22세 청년 초보 왕 세종입니다.

요즘 젊은 대학생들이 학업 스트레스 등으로 자살을 한다는 소식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꿈을 실현할 곳으로 알고 들어간 상아탑이 다시 살벌한 전쟁터처럼 느껴지는 모양입니다. 우리의 청년들이 달리 생각하고 달리 바라보아야 할 세상은 없는 것일까요? 오로지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아야 사는 것일까요? 이런 스트레스조차도 넘어서야 진정 목표에 도달하는 것일까요?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아름다운 세상이 있을텐데요.

어쩌면 우리 청년들의 때와 그 이전에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폭넓은 독서와 인문고전을 읽고, 사색하고, 여행도 하고, 음악도 듣고, 좋아하는 취미도 갖고, 친구끼리 이념과 시사에 대한 논쟁도 하면서 그렇게 마음을 단단히 여미면서 유연한 마음자세를 갖는 시간이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허무한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세종의 말씀처럼 학문의 진정한 유익은 바로 그런 공부가 병행되어야 참된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닐지 싶습니다.

지금이라도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내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다시, 세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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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여 년 전 조선이란 나라에서 세종이란 걸출한 군주는 얼떨결에 왕위계승자인 세자가 되고 다시 2달도 되지 않아 왕이 된다. 교육이랄 수도 없는 가장 짧은 세자교육을 거치고 왕이 된 세종은 기대이상으로 잘 해낸다. 아니 역사는 그를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쓸데없는 짓이라지만 이런 콩 볶듯 하는 전위과정이 없었다면 우리역사는 자랑스러운 세종을 갖지 못했을 것이고 훈민정음을 비롯한 많은 유산들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혹 다른 누군가 그런 역할을 했을지는 모르지만!(그래서 역사에서 가정은 쓸데없는 짓인가 보다)

후계구도는 중요하다. 장자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 전통도 있었지만 부왕 태종의 ‘왕위의 장자계승 의지’는 견고했다. 조금 부실해도 어떻게든 고쳐서 써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대를 걸만하면 옆으로 새고 다시 또 제자리 오는가 싶으면 여색에 빠져 실망하게 하는 첫째 아들 양녕의 태도는 그런 태종에게 심각한 의문을 갖게 했다. 그리고 후계자 문제는 신하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이다. 모시기 힘든것도 있지만 왕의 측근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폭주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협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부왕 태종의 은근한 세자교체의사에 신하들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장자계승이 아닌 어진이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택현;擇賢)는 의견을 들고나온 신하들의 의견에 태종은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고 3째아들 충녕을 세자로 결정하게 된다.

그 대화내용이 재미있다. 몇가지 반론은 제외하고 신하들의 의견으로 시작해 보면


여러 신하가 모두 아뢰기를 (...)청컨대 그 중 어진이를 골라서 세우시기를 바라옵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그러면 경들이 마땅히 어진이를 가리어 아뢰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함께 아뢰기를,

아들이나 신하를 알기는 아버지나 임금과 같은 이가 없사오니, 가리는 것이 성심(聖心)에 달렸사옵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충녕 대군이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비록 몹시 춥고 더운 날씨라도 밤을 새워 글을 읽고, 또 정치에 대한 대체(大體)를 알아, 매양 국가에 큰 일이 생겼을 제는 의견을 내되, 모두 범상한 소견이 의외로 뛰어나며, 또 그 아들 중에 장차 크게 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자가 있으니, 내 이제 충녕으로써 세자를 삼고자 하노라.”

하였다. 여러 신하가 함께 아뢰기를,

신들의 이른 바 어진이를 골라야 한다는 말씀도 역시 충녕 대군을 가리킨 것이옵니다.” 하였다.



 

평소에 어떻게 공부를 하고 인품을 다듬으며 덕을 세우느냐에 미래가 달려 있는게 인생인가 보다. 평소 호학하고 효제하며 총명한 셋째왕자 충녕과 맘대로 휘젓고 다니는 양녕간의 격차가 커지자 운명이 뒤바뀌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면 혹 나에게 간택의 대상이 될 만한 꺼리가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부질없다 싶어 덮어버린다. 택도 없다는 생각때문에!

세종전도사, 김태균의 세종이야기  http://blog.naver.com/asase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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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착하지 못하다 하는 것으로 어찌 죄를 주겠느냐?

我爲不善, 何忍加罪?(아위불선 하인가죄?)


 

조선시대 왕을 비난하는 것은 3족을 멸하는 역모죄에 해당한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역모를 고발하는 것으로 급격한 신분상승을 꿈꾸었고 없는 일도 만들어 내던 시기였다. 더구나 조선초기 왕권과 통치의 안정을 닦아야 할 시기, 임금에 대한 비방발언은 실수로 나왔다 하더라도 엄청난 파장을 초래한다. 이때 조원이라는 사람이

 

 “지금 임금이 착하지 못하여서 이와 같은 수령(守令)을 임용했다.” 라고 하였다. (세종604/04)

 

이것을 난언이라 하는데 이 말을 옆에있던 노비가 듣고 알린다.

이런 고자질이 잘만 성립되면 노비에서 양민으로, 나아가 상당한 재산을 상으로 받기까지 한다. 아마도 이것을 노렸음직 하다.

드디어 살벌한 의금부 등이 임금에게 처벌하기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의금부 제조 및 삼성(三省)에서 계하기를,

조원(曺元)이 비방한 연유를 신문하니, 답하기를, ‘내가 전지(田地) 송사를 하여 관()에서 판결하기를 기다리는데, 수령이 손님을 대하여 술을 마시면서 속히 판결하지 않으므로, 분하고 성이 나서 이 말이 나왔다. ’고 합니다.


 

하지만 세종은 다음과 같이 전지한다.

 

 “다시 묻지 말라. 무지(無知)한 백성이 나를 착하지 못하다 하는 것은 바로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차마 어찌 죄를 주겠느냐. 속히 놓아 보내라.

勿更問之 無知小民以我爲不善, 正如孺子將入於井, 何忍加罪? 其速放歸

(물경문지 무지소민이아위부선, 정여유자장입어정, 하인가죄? 기속방귀)


 

이런 일은 그냥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신하들의 충성경쟁이 시작되고

계속되는 상소(5번이상)로 임금을 욕(?)한 죄인을 벌주기를 요청한다. 집요하다.

그 논리는 주로 후인을 경계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일벌백계하라는 것이다.

 

다시 지신사(비서실장) 곽존중(郭存中)과 다섯 대언(수석비서관들)이 들어와서 아뢰기를,

“주상께서 조원의 무지한 망발을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해서 놓아 주고 논죄하지 말라 하시니 이것은 비록 성상(聖上)의 미덕이시나, 그러나 이와 같은 죄를 논하지 아니하시면 무엇으로 후인을 징계하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6 04/17)


 

세종은 애민의 군주였다.

국가를 혼란하게 하거나 백성을 못살게 하는 비리에 대해서는 과감한 법 집행을 했으나 자신에게 던지는 난언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게 용서한다.

계속되는 신하들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의리에는 그러하나 마음으로는 그러지 못하겠다는 애민의 다스림을 양보하지 않는다. 다시 실록의 기사를 보면

 

육조와 의정부에서 조원을 법대로 처치하여 후인을 경계하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조원의 말이 나에게 누가 미치는 까닭으로 경 등이 다 치죄(治罪)하기를 청하는데 의리에는 진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나를〉 지척(指斥)한 죄로 조원을 죄주는 것은 내 마음으로는 차마 못하겠다. 또 근래에 수재와 한재가 서로 잇달아 백성이 매우 간고(艱苦)한데, 조원이 사는 고을 관원이 이런 간고함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손님과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시면서 전지 소송을 오랫동안 미루고 결단하지 않았으므로, 조원의 말은 이것이 미워서 나온 것이니 경 등은 조원을 죄주기를 청하지 말라.” 하였다(세종6 04/25)


 

그리고 다시 사간원의 상소가 이어진다.

 

우사간 이반(李蟠)·장령 정연(鄭淵)이 교대로 글을 올렸다.

“신 등이 전일에 조원의 불충 불경한 죄를 가지고 상소를 갖추어 아뢰어서 법대로 처단하기를 청하였사오나, 전하께서는 특히 자기를 그르다 한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서 그대로 두고 논죄하지 말게 하시니, 이것은 비록 전하께서 〈만물을〉 포용하시는 큰 도량이시나, 악을 징계하고 후일을 경계하는 뜻에는 섭섭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면서,

“내 어찌 자손 만대의 계책을 하지 않으랴마는, 조원에게 죄주는 것은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이다.”하였다.(세종6 05/01)


 

법을 집행함은 계절의 순환(사시:四時)과 같이 엄정하고 정확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계속되는 신하들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결국 죄주기를 거부하는 세종의 태도는 무엇이 대의를 위한 처벌이고 무엇이 용서의 덕목인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교훈이다. 요즘 종종 회자되는 괘씸죄를 세종은 용납하지 않으셨다.

 

세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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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죄에 대하여는 살릴 수 있는 도리를 구하고,
중한 죄에 대하여는 가볍게 할 수 있는 단서를 찾으라


聽死罪則求可生之道, 聽重罪則求可輕之端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는 사람에 대해 족치는일이 주업무인 사헌부(지금의 검찰청)에서
감옥의 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실록원문>


“신들이 간절히 염려하옵는 것은, 옥 중 하루는 마치 1년을 지내는 것 같다 하옵고,

또 한 사람이 옥에 갇혀 있으면 온 집안이 그 때문에 근심과 고통을 겪게 된다 합니다.
그러기에 옥이란 성인(聖人)이 중난하게 다루는 바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반드시 제 몸이 죄악을 범한 사람이라야, 부득이 잡아 옥에 가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선산(善山)에서 갇혀 있는 김제(金制)와 정평(定平)에서 갇혀 있는

두언(豆彦)은 모두 다 그들이 몸소 죄를 범한 자가 아니옵고,

다만 그들의 자식이 죄를 범하고 도망하였기 때문에 그 간 곳을 신문하느라고

여러해 동안 옥에 매어 있으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대저 부모를 생각하고 돌보아 늘 삼가고 경계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군자의 행실이거니와,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야 어찌 부모를 위해 마음을 쓰겠습니까.

또 부모로서야 비록 그 자식이 도망가 있는 곳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의 사이는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지극한 정리일 뿐더러,

나타나기만 하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니, 어찌 차마 고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사정이므로 비록 오래 옥에 가두어 두더라도 일에는 이익이 없을 것이오니,

 

비옵건대 이제부터는 죄를 범하고 도망한 자가 사직에 관계되는 일 이외에는

그 범죄자의 부모나 처자를 잡아다가 고문하더라도 여러 달이 걸리지 않도록 할 것이요,

만일 끝내 범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법률 조문에 의거하여 판결을 내리고

판결문을 작성해 두었다가, 뒷날에 범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죄를 결판하도록 하시와

호생(好生)의 덕()을 넓히시옵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좇았다.(즉위년 8/17)


 

연좌제가 일반이었고 효와 충을 중심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감옥풍경은 살벌하였다.

동시에 환경 또한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옥중에서 병들어 죽고, 지쳐 죽고, 고문받아 죽는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환경에 대한 세종의 관심은 지극한 것이어서 한여름에는

더위를 식히라고 대야에 물을 담아 넣으라는 지시를 직접 하기도 한다.

 

감옥과 죄인에 대한 인식을 대표하는 말씀 한마디!

 

<실록원문>


“옥사(獄事)를 듣는 법은 진실로 마땅히 공평 무사(無私)한 마음으로 공정 명백히 물어야 할 것이며,
죽을 죄에 대하여는 살릴 수 있는 도리를 구할 것이요,
중한 죄에 대하여는 가볍게 할 수 있는 단서(端緖)를 찾을 것이니
,
실정을 살펴 죄를 처단한다 하여도 오히려 실수함이 있거든,
하물며 이제 헌부(憲府)에서는 말이 위에 누()됨이 있다 하여,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실정과 거짓을 잘 살피지 않고 위엄으로써 핍박하여,
죄가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극형(極刑)에 들어가게 하니, 만약 이를 믿고 죄를 처단한다면,
이 어찌 무고(無辜)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이 아니겠느냐.”(실록 4/10/24)


 

 

애민의 시작은 곤란을 겪고 있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시작된다.

결국 어리석은 백성이 제 뜻을 펴지 못함을 불쌍히 여겨한글을 만드심으로 대미를 장식하셨듯이…!

 

세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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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폐단이 있으면, 그것을 폐지하는 것이 옳다

事之有弊, 除之可也(사지유폐 제지가야)


 

 

왕이 된 자신에게 부여되는 권위와 형식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한다.
즉위한지 3일만이고 만 21세 때의 말이다.

 

임금이 되었다 해도 늘 하던 대로 아버지 태종에게 조석으로 문안인사를 해야 하는데
임금이라는 신분이 번거로운 행사로 변해 버렸다.
대군 시절에는 편안하게 아버지 상왕께 출입하였으나 왕이 된 뒤에는 개인의 문안이 아니라
국가대표 또는 국가 그 자체의 문안이 된 것이다.

바로 옆에서 따르는 갑옷 입은 호위군사,
그들을 이끄는 대장격의 말탄 부장(행수),
그리고 다수의 내시들과 수발하는 사람들이 따르게 되니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닌것이다.
그리고 신하들은 전례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원칙론을 주장하며 예를 갖추겠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은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

일에 폐단이 있으면 폐지하는 것이 옳다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정확히 표현한다.

60넘은 노정승과 갓 20넘은 젊은 왕의 대화가 매우 상징적이다.
예와 절차를 중시하는 보수적 입장과 폐단이 있다면 폐지하자는 젊은 진보청년의 대화처럼….

 

하지만 세종은 유연함의 범위를 자신의 문제로 한정짓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의 전통, 아버지 태종이 세운 정통성을 갖춘 규범 등에 대해서는
불고소폐(不顧小弊:작은 폐는 돌아보지 않는다)하는 대범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종의 방식은 자신의 편리함을 위한 유연함이 아니라
다수의 불편함을 덜 수 있다면 스스로 조금 불편해지거나 단순해지면 된다는 합리성이다.


21
세의 청년 세종은 그렇게 자신의 왕업을 가꾸어간다.

 


<실록원문>

 

임금이 명하기를,

“예를 갖추어 거둥할 때에는 보갑사(步甲士)가 갑옷을 입고, 행수는 거둥 행렬의 맨 앞에서 보행할 것이요, 보통 거둥 때에는 갑사가 평상복의 차림으로 칼을 차고, 행수는 말을 타고 따르게 하라.

하니, 지신사(知申事) 하연 등이 말하기를,

“전례(前例)는 폐지할 수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하루 이틀의 간격으로 상왕전에 문안을 드리는데, 만일 늘 예를 갖춘다면 어찌 폐단이 없겠느냐. 대저 일에 폐단이 있으면, 그것을 폐지하는 것이 옳다.” 고 하였다(즉위년(1418)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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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왕이 되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다. 

셋째아들로 태어나 왕이 될 수 있는 순서에 있어서 거의 가망이 없었다.

먼저 세자 양녕이 건재했고(지나친 방탕으로 신임을 잃은것은 폐위 전 2-3년 내의 일이다)

둘째아들 효령이 있었고 거기에 세자 양녕의 아들까지 있었다. 적장자의 순으로 보자면

양녕의 아이가 어리기는 하지만 왕통계승의 차원에서는 논란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순위에서 결국 성실한 자세와 학문하기를 좋아하는 충녕이 세자가 되는 시점은

왕으로 즉위하기 겨우 2달 전이다. 조선의 왕들중에서 가장 왕자수업을 적게 받은 사람에 해당한다.

그리고 왕이되어 즉위교서를 반포하기에 이른다.

 

그 교서의 중심대목에 '시인발정_施仁發政'이란 말을 쓴다.

 

이말은 맹자에 나오는 맹자와 제선왕과의 대화에서 인용한 말이다.

원래 제선왕과 맹자의 대화에는 '발정시인_發政施仁'으로 표현된다.

즉, 정치를 왕성하게 펴서 어짐을 베푼다가 원래 어원이다.

하지만 세종은 어짐을 펴는것을 우선에 두었다.

향후 백성을 근본으로 보는 민본사상의 첫 공식출발인 셈이다.  

위민과 민본은 다르다. 위민은 백성을 위한다는 뜻으로 위하는 사람이 주체이지만

민본은 백성을 근본으로 보아 주체를 백성으로 설정한다.

 

정치를 넓게 펴서 어짐을 베푼다 _ 發政施仁(전통적 정치의 모델)

어짐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킨다 _ 施仁發政(세종식 정치의 출발) 


출발선에 선 세종은 바로 그 차이만큼이나 어짐을 앞세우고 혹독한 시련들을 극복해내며

조선조 최고의 성군으로 첫발은 내 딛는다.

 

<실록원문>

 

임금이 근정전에 나아가 교서를 반포하기를,

 

...영락 16년(1418년 세종 즉위년)8월 초10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위에 나아가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고, 부왕을 상왕으로 높이고 모후를 대비(大妃)로 높이었다.

일체의 제도는 모두 태조와 우리 부왕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할 것이며, 아무런 변경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의례에 부쳐서 마땅히 너그러이 사면하는 영을 선포하노니,

영락 16년 8월 초10일 새벽 이전의 사건은

대역(謀叛大逆)이나 조부모나 부모를 때리거나 죽이거나 한 것과

처첩이 남편을 죽인 것, 노비가 주인을 죽인 것,

독약이나 귀신에게 저주하게 하여 고의로 꾀를 내어 사람을 죽인 것을 제하고,

다만 강도 외에는 이미 발각이 된 것이나 안 된 것이거나 이미 판결된 것이거나 안 된 것이거나,

모두 용서하되, 감히 이 사면(赦免)의 특지를 내리기 이전의 일로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이 사람을 그 죄로 다스릴 것이다.

 

아아, 위(位)를 바로잡고 그 처음을 삼가서, 종사의 소중함을 받들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야 
바야흐로 땀흘려 이루어 주신 은택을 밀어 나아가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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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기회를 주심에 감사하며...그 첫발을 딛습니다.

세종대왕의 묘효와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으로 엄청난 뜻이 담겨있습니다.
굳이 뜻을 풀어적을 필요 있을까요? 쩝~~그래도 참고삼아 알고 넘어가죠

세종은 묘호이고 돌아가신 후 종묘에 신위를 올릴때 일컫는 이름입니다.
장헌~대왕까지는 시호, 즉 그의 행적을 기리고 일생을 평가하기 위해 올린이름입니다.
세종사후 신하들이 올린시호이며 맨 앞의 장헌은 명나라에서 맨 마지막에 내려준 시호입니다.
뜻은 대략 이렇습니다.

'영특하고 문명하면서 과단성이 있고 강하고 신중하고 너그럽고 인자하고 효성스럽다'

그냥 엄친아의 대표격입니다. ㅎㅎ
우리는 그냥 세종대왕으로 부르고 있죠...

간략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397년 5월 15일(음력 4월10일)에 태어나셨습니다. 혹시 생일이 같은분 계시면  축하 함께 하죠..
그리고 1450년 4월8일(음력 2월 17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임금의 위에 있은지 33년차입니다.

대왕을 소개하는 글을 잠간 인용합니다. 기가 팍~~ 죽습니다. 사람일까 싶은데...나름 부족함도 있었습니다.

"어릴적부터 그 용모가 단아하고, 자질이 총명하고
성행이 돈독 근면하여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고
병환이 나서도 한결같이 글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며
한번 눈에 거친글은 다 새겨 잊지 아니하였다.
임금자리에 오른뒤에도 나날이 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는
학문과 궁리, 창조와 경륜에 마음을 쏟아 잠시라도 팔짱을 끼고
한가히 앉아 있는 일이 없었다
나라를 다스리기 서른두해동안에 가지가지의 새로운 빛난 문화를 창조하여
겨레의 생존 발전에 영구히 다함없는 은덕을 길이었다"



위인이라 할 만 합니다. 좀 폼나게 적어 두긴 했지만 얼추 비슷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종께서는 놀기도 잘 하셨습니다.
격구라는 운동(요즘의 자치기와 골프가 결합된듯한)도 즐기고 매사냥도 즐기곤 하셨죠...

그는 우리국가와 민족의 큰바위얼굴입니다.
우리 마을을 구원하고 잘 살게 해줄 현인이 언젠가 오겠지란 전설을 믿고 계속 쳐다보면
우리 스스로가 그를 닮아가는 큰바위얼굴...

그 첫발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집단지성브랜드네트워크 40라운드와 함께 함이 영광이고 기쁨입니다.

세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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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시대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호연히 홀로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가 미칠 바가 아니다. 주상의 은총을 만나 간()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諫行言聽), 죽어도 한이 없다(세종21년 재상 허조)

 

무엇이 이토록 기쁜 마무리를 할 수 있게 했을까?
신하로서 섬기는 주군에게 죽음을 앞두고 이와 같이 말 할 수 있다는 것은 군신 모두에게 복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결과는 군주와 신하간의 소통(
疏通) 방식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세종이 재위에 오르고 나서 회의시간에 다음과 같은 불만을 내비친다.


아직 과감한 말로 면전에서 쟁간(爭諫)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으며

또 말하는 것이 매우 절실, 강직하지 않다….

중론을 반대하여 논란(論難)하는 자가 없다

 

결국 직언하지 않으며 민감한 사안들을 회피하고 대세추종의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는 의미이다.
선대왕인 태종시대의 엄중함을 겪은 신하들로서는 당연한 분위기일지 몰라도 세종의 이러한 지적은 남다르지 않은가! 편안함을 버리고 올바름을 추구한 것이다.

 


세종은 새로운 회의풍토를 만들기 시작한다.

 

첫째, 자주 불러서 묻고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의논하자’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잘 의논하여 아뢰라라는 말을 세종은 즐겨 사용했다. 때로는 백성을 직접 찾아가서 묻기도 했다. 당시의 군주로서는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하들이 ,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만 읊을 수 없는 상황 아니겠는가! 당연히 자신의 주관과 의견을 지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한 입장정리를 할 만한 공부와 상황파악이 선결되어야 함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것이 더 적극적이고 활발한 토론의 장으로 발전하게 된 배경이다.

 

둘째는 먼저 수긍하고 경청하되 이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 뜻이 좋다’ ‘네 말이 아름답다’ ‘경의 말이 매우 좋다(卿言甚嘉)’와 같이 말한다. 그리고 의견이 다를 때 그러나로 이어지며 자신의 의견을 내 놓는다. 고약해의 강무비판에 대해서도 경의 말이 매우 좋도다. 그러나 강무는 유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세종은 좋은 말을 듣고도 거절하는 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닐 듯 하다. 하지만 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말 한마디만으로도 신하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며 서로를 존중하는 신뢰의 토대를 놓은 것이다.

 

셋째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며 평정심을 유지했다.

사실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왕이 신하들의 면전에서 수시로 화를 내는 것은 매우 큰 약점이 될 수 있다. 역사속에는 가까운 측근들의 배반이 몇 마디 말로 상처를 입어 모반을 키운 예가 얼마든지 있다. 세종은 군신간의 회의 및 토론상황을 유지하고 발전하는 것을 개인의 감정표현보다 우위에 둔 것이 분명하다. ()하는 신하 입장에서 수시로 화를 내며 언로를 막는 군주에게 계속 간언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넷째, 실사구시(實事求是)형 회의를 주도했다.

토론을 위한 토론, 현학의 경쟁으로 흐르기 쉬운 회의를 실행을 위한 결론을 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고전의 인용으로 의논을 만들기도 하고, 이념논쟁을 원천차단하기도 했다. 군신간에 대결국면이 만들어지면 왕에게 세 번 간해서 듣지 않으면 벼슬을 버리고 떠난다(三諫不聽則去)’라는 논어의 구절을 인용해 국면전환을 꾀하거나 무릇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대들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혐의쩍게 여기지 말라라는 위로의 말을 던지기도 했다.

 


이러한 회의를 주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이러한 문제들에 노출되는데 당시의 세종도 마찬가지였던 듯 하다. 형식적인 절차로서의 회의, 너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현학적인 표현만 일삼으며 발언을 독차지 하는 사람, 최고결정권자의 의견에 무조건 동조하려는 태도, 참석자들간의 의견차이로 인한 감정적인 대립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회의를 주재하는 군주의 노력과 지혜는 특별히 중요한 사안이다.

쟁간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적절한 언어를 사용하며 사안에 대한 이해를 돕도록 신하들을 독려하고 또 분위기를 함께 만들어 가는 신하의 말에 힘을 실어주며 반대의견을 경청하는 일관된 모습 등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회의분위기를 통해 조선시대 최고의 회의장면으로 기록된 파저강토벌 대논쟁은 그 결정판이다.


세종즉위 원년의 대마도정벌의 실패사례를 일깨우며 세종 14년 여연지역의 여진족 침범소식에 파저강 토벌 대논쟁은 시작된다.

3단계로 이루어진 토론은 먼저 중국에 보고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재위 14 12 9일부터 21일까지 12일간 이루어지고 결국 중국황제에게 보고할 것를 결정한다.


이후 두번째 논의는 토벌을 실제로 감행할 것인가 란 주제로 재위 151 11일부터 19일까지 9일간 열띤 토론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실질수행자일 수 밖에 없는 최윤덕 장군의 반대를 찬성으로 변화시키고 직접 토벌작전을 주도하도록 힘을 실어 준다.

반대하던 신하가 찬성으로, 그것도 진심으로 돌아서게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에게 모든 임무와 책임을 맡기는 일 또한 특별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벌의 시기와 방법에 대한 토론이 재위 15(1433) 2 15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진다. 이때는 지속적인 반대론자인 허조의 입장을 존중하며 집단적 사고의 위험에 빠지지 않는 점검과 검토의 세밀한 전략을 다루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 파저강 토벌작전은 대승을 거두게 된다. 혹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조선판 갈리아 전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세종식 회의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있었다.


1
원칙 : 충분한 토론(숙의:熟議)과 전적인 일임(전장:專掌)

2원칙 : 토론 중 좋은 의견이 나오면 바로 힘 실어주기(:황희 말대로 하라)

3원칙 : 집단사고로 인한 착각의 함정 피하기(:허조의 비판에 귀 기울여라)

 

참고로 집단사고 또는 집단적 착각이 발생하면 지도자로서 치명적인 결단을 내리게 한다.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는 이유는 집단의 단결력이 강할 경우, 정책결정과정에 소외된 인원이 많을 경우, 사안에 대한 최고의사결정권자의 의지가 강할 경우 집단환상에 사로잡히기 쉽다. 미국의 베트남참전이 좋은 사례로 꼽힌다.

 

이러한 위험을 경계한 인물이 허조이다. ‘말라깽이 송골매 재상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정책의 음지, 예상 문제점, 최악의 경우 등을 조목조목 짚으며 정책의 일괄타결이 가져오는 위험을 방지한 인물이다. 이러한 사람이 끼어있는 회의는 진행하기가 어려워진다. 세종은 허조는 고집불통이야라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중용하며 경청했고 그에게 깊은 신뢰를 보였다. ‘보수와 대쪽의 상징인 허조는 세종시대를 이끄는데 없어서는 안될 명재상이었다. 그 임금에 그 신하라고 할 만한 관계이다.

 

오늘날 세종식 회의를 다음과 같이 구성해본다면 어떨까?

 

의제결정 : 최고결정권자(세종)

아이디어 제공자 3(김종서, 조말생, 최윤덕)

비판자 2(논리적 비판-허조, 감정적 비판-고약해)

요약정리 : 황희

회의내용기록 : 우사관

회의 분위기 등 관찰기록: 좌사관

 

 

 

千歲之致  始於一刻不差  庶績之熙  由於寸陰之無曠

(천세지치 시어일각부차 서적지희 유어촌음지무광)

 

천 년의 긴 세월도 일각의 어긋남 없음에서 비롯되고

모든 공적의 빛남은 촌음을 헛되게 하지 않음에서 말미암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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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친정기(親政期)의 시험대  - 기근(饑饉)구제를 통한 위기의 리더십


세종시대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이 임금 때문에 흉년이 들어 살기가 심히 어렵다. 내가 만약 임금이 된다면 반드시 풍년이 들 것이다(세종 5년)’ 강원도 고성의 이각(伊覺)이란 자의 말이다.


흔히 역사속의 태평시대에는 모두 평온했고 전쟁도 없었을 거란 일반의 인식을 뒤엎는 참변이다. 유언비어가 유포되면 곧 정권이 넘어가는 위기의 시대였다. 이러한 위기에서 세종은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하며 치세의 리더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는지가 자못 흥미롭다.


세종 친정기 초반에 굵직한 위기 2가지는 강원도의 기근과 도성의 대화재사건이다.


먼저 기근문제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강원도 인구의 27%인 2600여 호가 유리하여 사라지고 토지가 황폐화되었다. 종자가 썩고, 뿌린 씨앗을 다시 파내 주워 먹어야 했다.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처자식을 버리고 떠나거나 소리치고 울며 따라오는 자식을 나무에 묶어놓고 가기도 하는 비참한 지경에 내 몰렸다. 타 지역으로 먹을 것을 찾아 떠났지만 어느 지역인들 넉넉했을까!


세종은 다음과 같은 대책들을 지시한다.


 첫째는 현지실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었다.

‘흉년을 구제하는 것은 결코 완만히 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정무의 제 1순위에 기근구제의 대책을 강구하는 일에 매달렸다. 이 가운데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실태파악을 괴롭히는 현지 수령방백들의 거짓보고를 엄벌하는 것이다. ‘백성을 위해 창고를 임의로 풀었거나 거둬야 할 곡식을 다 수납하지 못한 것은 지역수령의 관할에서 할 수 있는 일이나 그 형편을 사실대로 전계(보고)하지 아니한 것만큼은 죄를 주어야 한다’는 분명한 입장정리이다. 결국 문제에 대한 상황파악을 1순위로 둔 것은 현상에만 매달리지 않는 장기적인 계획과 대처를 가능하게 하는 첫 관문이라는 인식이 그의 리더십의 출발이다.


둘째는 기민(飢民)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했다.

‘기민들이 대규모로 이동하면 타 지역의 그나마 무사한 지역까지 함께 굶주리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 됐지만 ‘한가한 관원의 불필요한 말’로 강행했다. 하지만 실은 이러한 문제가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떠도는 사람은 많았으나 굶주려 죽는 사람은 적었다’  응급처방과 십시일반의 정신까지 갖춘 방법이다.


셋째는 구휼방식의 변경을 꾀했다.

어디서 왔는지를 묻지 않았고, 구휼(救恤)하는 사람들을 관원에서 승려로 바꾸고 숙소를 마련해 주며 역질에 걸린 사람들을 별도 격리 하는 등의 과감한 조치들을 단행하면서 기근문제를 현장에서 처리하게 했다. 그리고 거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즉 자존감을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여 ‘많은 사람들이 와서 살아나게’되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혁신적인 구제방식의 변경은 강력한 왕의 의지와 충직한 신하들의 협조가 없이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통해 세종은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밥은 백성의 하늘이니(食爲民天) 농사는 늦출 수 없는 것(農事不可緩也)’이라


민생안정을 위해 세제개혁을 단행하여 국가재정을 만회했다. 신세제 도입, 불교종파의 통합과 노비혁파 등의 개혁 외에 국왕가족의 재산을 축소한 일은 특별한 조치로 받아들여진다. 당시 선대왕으로부터 이루어진 가계의 인원수만 해도 대략 80명이 넘는 왕족이 정승(150결)보다 많은 300결의 토지를 분배받았는데 이를 각 50결씩 줄이는 방안을 실행했다. 요즘말로 하면 국왕의 재산헌납이다. 비록 신료들의 반대가 있다 하더라도 왕이 스스로 왕가의 재산을 줄이는 마당에 어찌 저항할 수 있겠는가? 리더의 솔선수범의 전형이다.


이후 간척지 개간 등 농지를 대폭 확대했다. ‘전라도에 황무지가 많더니...호수와 인구가 매우 번성하고 산림과 초목이 우거진 늪이 모두 개간 경작되었다’라는 보고가 올라올 정도로 간척개간의 진척을 많은 효과를 보았다. 특히 함경도 지역의 효과가 커서 국방강화와 함께 많은 유리민들이 모여 정착하게 했다.


조선의 기후 및 토양조건에 맞는 농법개량과 보급 등의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하늘의 재변은 인력으로 어찌 할수 없으나 사람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는 심력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과 수전농법의 발전, 파종시기의 선택을 통해 논농사의 방법을 알게 되었다. 바람에 강한 볍씨의 보급, 구황작물의 식량대용화, 한해 두 번익는 올기장(早麥)의 보급등이 그것이다.


이런 정책의 꾸준한 추진으로 2배의 농지가 늘어나고 2배의 생산성증대를 가져왔다. 결국 4배의 농업생산력을 키운것이다. 밥은 백성의 하늘인데 그 하늘을 편하게 해 준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항은 관리들이 국가시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한 일이다.

기민을 죽게 한자는 비록 공신의 자손이라도 모두 곤장을 쳤으며 돈을 내고 벌을 면제받는 것을 허락지 않는’ 왕의 의지를 표명하는 강제의 방법도 동원했지만 내가 하는 일이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라는 신념을 갖게 해준 세종의 통치리더십이 더욱 큰 빛을 내게 한 것이다.

이디오피아에서 한 어머니가 굶어죽은 아이를 묻으러 가고있다.
우린 너무 풍족하지 않은가!


세종은 자신의 본분에 대해 분명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달성하기 위한 세부목표와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론도 숙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것이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남다른 점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능력이 탁월하다 할 것이다.


세종의 명연설 1 - 왕가의 재산헌납을 제안하며

하늘의 재앙(天災)과 땅의 이변(地異)의 있고 없는 것은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마는 배포조치(配布措置)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다 할수 있는 것이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 큰 기업을 이어받아 능히 치평(治平)을 하지 못해 아래 백성들이 굶어 죽게 되었으니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장차 깊은 못에 떨어질 것만 같다.

자손이 번성하고 많은 것이 경사라고는 하지만 한갓 국록(國祿)을 허비하고 건물이 또한 많아 그 때문에 재앙이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내가 심히 부끄럽다. 그 나머지 종성(宗姓)들의 과전은 갑자기 감할 수 없으므로 친아들 친손자의 과전(科田)을 감하려고 하는데 여러 사람의 뜻은 어떠 한가‘(세종실록 19/01/12)



Writer Profile
김태균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사람답게 사는것과 행복한 성공을 위해 자신을 찿아가는 여정을 고민함. 내일을 위해 오늘을 성실히 경영해야할 경영자로서 1인기업과 브랜드를 만들 자기경영플래너!
주니어리더십센터 및 미래형커리큘럼연구소 소장, 유엔젤문화재단 상임이사.
저서:지혜의 숲에서 길을 찾다,굿바이 딜레마. http://dreamerchant.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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