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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실록아카데미

 【세종대왕의 창의경영】 강좌안내

 

세종문화회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가 2010년 03월 08일부터 06월 14일까지 15주간 매주 월요일 세종문화회관 세종예술아카데미에서 “세종실록아카데미 - 세종대왕의 창의경영” 강좌가 열립니다.

이번 강좌에서는 특히 세종과 그 시대 인물들이 어떻게 난관을 극복해 나갔는가 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혁신적인 문제해결방식”을 살펴볼 것입니다.(본강 14회) 그리고 13회의 특강 시간에는 세종시대를 폭넓게 배울 수 있는 여러 주제들을 배우게 됩니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 손욱 한국형리더십연구회 회장, 정기용 성균관대 석좌교수가 각각 세종시대를 폭넓게 배울 수 있는 주제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세종실록 아카데미 - 세종대왕의 창의경영」 강좌에 대한 개요 및 커리큘럼을 첨부하여 드리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세종실록아카데미(案)-2010 1학기.hwp

 

 문 의 처 : 전화 02-399-1603, 1606(세종종문화회관 교육사업팀 도준 대리)     

     수강신청 방법  1. 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에 가셔서 수강신청하시고 입급하시면 됩니다

  http://www.sejongpac.or.kr/sejongAca/sub/sub2_2_1_3.asp?iden=121 

                                      ( 무료회원가입- 로그인 필요 )

 

 2. 첨부파일 된  수강신청서 작성하셔서 메일이나 팩스로 보내시고 입금하시면 됩니다.

 E-mail : academy@sejongpac.or.kr    Fax: 02- 399-1519

 수강신청서(접수증).hwp          

 3. 입금은행:   외환은행   630-005595-074     예금주_ (재)세종예술아카데미  

 입금 후 전화로  확인 해 주세요( 02-399-1606/1603)

 4.  무료공개 강좌(2월22일(월))도  전화로 반드시 신청을 하셔야 수강 가능하십니다 

 (선착순 100명 수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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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8일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일요일 오후 새롭게 복원되고 있는 경복궁에서 세종대왕을 만났습니다. 곳곳에 숨겨져 있던 역사적 진실을 눈으로 보면서 과거 조선시대의 건축과 과학의 우수함을 지금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도 알게되 조금은 씁쓸하면서도 우리 조상에 대한 자랑스러움에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 날 경복궁을 돌며 세종시대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신 분은 세종실록 아카데미의 박현모 박사님이었습니다.

경복궁 전체를 안내해 주는 북궐도를 보며 답사 코스를 알려주고 있는 세종실록아카데미의 박현모 박사님

"혹시 세종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나요?"

경복궁 답사를 시작하기 전의 세종실록아카데미의 학생들



우리가 경복궁 답사를 하는 그 날은 수문장 교대의식이 있는 날이라 TV 사극에서나 보던 광경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색다른 재미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수문장은 도성문과 경복궁 등 국왕이 임어(생활)하는 궁궐의 문을 지키는 책임자로 엄격한 절차에 따라  궁성문을 여닫고 근무를 교대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은 물론 국가의 안위를 수호해 나갔습니다.

수문장교대의식의 절차


가. 초엄(북)이 울리면 , 교대 수문군이 이동을 위한 준비를 완료한다.

나. 중어이 울리면 교대 수문군이 행사장으로 이동한다.
다. 군례를 마치면 출문부, 궤함의 민원사항 등의 당직 업무를 인수인계한다.
라. 삼엄이 울리면 당직 수문군과 교대 수문군이 교대절차를 행하고, 당직 수문군이 수문장의 지휘 하에 퇴장한다.



수문장 교대의식을 알리는 입간판

수문장 교대의식을 거행하고 있는 사람들...



드디어 경복궁 정문을 지나 세종의 숨결이 곳곳에 뭍어나고 있는 왕궁답사를 시작했습니다.

금천교-사사로운 생각을 금한다라는 의미를 지닌 그 곳에서 다리 아래에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박현모 박사님은 물었습니다. "물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가?"고...
동에서 서로 흐른다,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등등 의견이 분분한 우리들을 한마디로 평정하시면서 하신 대답은 바로 "고여 있습니다. 양쪽을 막아 놓았거든요." 그제서야  흐르던 물이 잔잔히 고여있음을 알았고 결국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보고 있음을 다시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금천교 아래에 잔잔히 고여있는 물... 이 금천교를 지나면서 사사로운 생각을 다 버리고 지나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는지를 지켜보는 듯한 사자(?)상이 인상적이다.




경복궁에는 4개의 문이 있는데  각각 동쪽에 건춘문(建春門), 서쪽에 영추문(迎秋門), 남쪽에 광화문 (光化門), 북쪽에 신무문(神武門)입니다. 처음 근정문으로 들어가면서 본 건물은 중국과 같은 거대한 건물은 아니지만 서서히 들어가면서 점차 그 위용이 드러나는 건축기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웅장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금천교를 지나 처음 들어가는 근정문

뒤로 인왕산의 위용과 근정전의 모습이 묘한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근정문을 지키는 수호신

세종실록 아카데미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고 있는 김태균 실장님... 덕분에 단체사진에는 늘 투명인간이다.

천원지방-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모양을 본따 기둥을 받치고 있는 돌을 만들었다.

근정전은 외교 사신이 오거나 손님이 왔을 때 접대하는 정치적인 공간이라 약간은 부담감과 함께 위엄이 느껴진다.



그러나 길게 늘어서있는 기둥사이에 난 작은 문을 나서면 우리나라 나무들로 수목이 된 평안하면서도 따뜻한 공간이 드러납니다. 이곳은 왕궁 식구들을 위한 곳이라서 사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나무 중에서 유독 굵은 허리를 자랑하는 은행나무가 눈에 띄였습니다.
경복궁과 성균관에 유난히 은행나무가 많은 이유는 바로 은행이 유교의 상징적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보리수는 불교를, 올리브와 감나무는 기독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공적인 공간으로 대표되는 근정전을 나오자 사적인 공간이 펼쳐져 있다. 모두 우리나라 나무라 편안한 느낌이다.

가을을 느낄 수 있는 노란 은행잎이 우리를 반긴다.

가끔 퀴즈를 내시며 분위기를 띄우고 계시는 박현모 박사님


든든한 유교의 뿌리를 나타내고 있는 은행나무...

근정전을 지나 편안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경복궁 안을 안내하고 있는 박현모 박사님


수백년은 됨직한 은행나무가 문을 지키고 있다.

대추나무에 숨겨진 뜻이 다산이구나... 그럼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대추나무 아래에서 비는 건가???

우거진 수풀 뒤에 새로 건축한 건물이 보인다.

멀리 인왕산이 보인다.



향원정... 향기가 멀리 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군자의 위풍은 감출수록 불어나고

연꽃의 향기는 감출수록 더 멀리 간다.


소인의 방귀는 감출수록 더 구리다...는 박현모 박사님의 말이 기억이 납니다.



열상진원샘- 열상은 한강의 옛이름이고 진원은 진짜 근원이라는 의미이므로 한강의 진짜 근원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는 경복궁의 물의 근원이기도 하고 조선왕조의 물의 근원이기도 하지요.
고구려의 진원은 아리수, 이는 손이 아리도록 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꺼번에 웃게 만든 이가 바로 김태균실장님이다. 김치대신 헤벌레~~~~~~~~ 하니까 모두 웃는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에서 색을 제한다면 아마 이런 이미지겠지.. 본연의 아름다움, 잔잔한 감동...

흑백사진속의 하늘... 구름, 그리고 나뭇잎의 조화로움... 차 평화롭다.



자경전- 왕의 어머니가 묶는 곳으로 작은 소품이나 벽에 그린 그림만 보아도 섬세하게 신경쓴 모습이 보입니다. 매화,달,새 등 벽화는 부드러움을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나무와 새

매화와 달 그리고 새

꽃과 나비

처마 위의 조각들이 유난히 외로워보인다. 아마도 머물고 있는 분의 외로움이 전해져서이겠지...

이 문의 모양을 보고 외국사람들은 한참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고 한다.



아미산정원은 왕비가 첩들의 군기를 잡던 곳이나 아픔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왕비를 위해 산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심어 놓았다고 한다. 그 정원 위로 보이는 하늘이 유난히 고즈넉하다.


왕비가 궁녀들을 군기잡는 곳이라는데 픙경 하나는 끝내준다... 산을 옮겨 놓았다고 하던데...

하늘의 푸르름이 조선왕조의 숨겨진 아픔으로 와 닿는다. 닫힌 공간에서의 자유란 무엇일까?

투명한 자연스러움을 보며 그 옛날 왕비도 적적함을 달랬겠다.

고즈넉하다는 의미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경회루... 그 위용이 웅장하다.

물,하늘. 그리고 지붕 그 옆을 지키는 경회루... 그 앞에서 과거시험을 보곤 했다는데...

집현전이라 알고 있는 사정전 뒷모습...

버드나무의 굽어진 모습이 우리 역사의 힘겨움으로 다가온다.



세종대왕은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역시 경복궁 곳곳에 남아있는 그 흔적들을 하나하나 파헤쳐가는 현장답사는 세종실록 아카데미의 또다른 묘미가 된 것 같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주말 어느 오후, 경복궁에서의 세종대왕과의 만남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방미영 원장님과 조연심...

참 열심히 공부하는 구나! 마치 세종의 딸들 같구먼... 역시 배움은 좋은 것이여~~~

사정전-제발 생각좀 하고 정치하라는 또다른 의미로 해석을 하니 나름 기억이 나는 곳이다. 여기는 전엔 집현전이었다. 우리의 단체사진의 끝은 바로 여기 사정전 앞이었다. 다들 생각은 하고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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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인재관


"집현전으로 하여금 역대 제왕의 사람을 쓰는 법을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세종실록 18/02/30)



[치평요람]
에 나오는 세종의 인재관은 한마디로 "토포악발(吐哺握髮)"이다.

'토포'는 주공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가 대답을 해야 할 경우 몇 번이고 입에 든 음식을 토해내고 대답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악발'은 주공이 머리를 감고 있다가 인재가 왔다는 말에 감던 머리를 붙잡고 나와 맞이했다는 것으로 인재를 귀히 대하는 자세를 나타내는 성어이다.


율곡 이이
가 말하는 세종의 인재관이다.   

"세종대왕은 사람을 쓰되 자기 몸과 같이 하였다. 현인과 재능 있는 이를 쓰되 그 부류를 따지지 않았다. 임용하고 말을 채택함에 오롯이 하여 참소와 이간질이 들어갈 수 없었다. 또 지위가 그 재능에 합당하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았다. 
  (이이,<율곡전서>2007 )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재를 보석같이 귀하게 여겼다.
둘째, 사람의 신분이 아니라 덕망과 재능을 우선해 인재를 발탁했다.
셋째, 사람을 뽑고 그들의 말을 들을 때 집중해서 들었다.
넷째, 그 사람의 재능이 그 자리에 적합하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았다.


"인재를 불러오는 것(擧賢)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말을 채택하여 쓰는 것(得用)이다"
                                                                             <치평요람>
                   
 
세종의 인재쓰는 법     

첫째, 마음 바탕이 착한가를 살핀다.  
즉 개인보다는 공동체 전체를 우선시하는지의 여부를 살핀다.      

"사람들은 처음에 부지런하다가도 나중에는 게을러지는 경향이 있다. 처음에 열성적으로 일하다가도 끝을 완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처음부터 열을 내지 않는자일까 보냐"  

둘째,집현전과 성균관과 같은 기관에서 인재를 길렀다.
집현전은 세종의 양재용현(養材用賢),즉 인재를 배양하고 등용하는 '인재의 저수지'이다. 

"나무를 심고 길러서 큰 목재를 만들어야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그 분야에 정통한 인재라야 크게 쓸 수 있다.(大用)"          

셋째, 공적으로 허물을 덮게 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단점이 있는데 훌륭한 지도자라면 단점보다는 그의 장점을 발견하고 제 위치에 배치해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해야 한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적합한 자리에 기용해 인재로 키워야 합니다.그리고  전능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적당한 일을 맡겨 능력을 기르는(爲能)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결점만 지적하고 허물만 지적한다면,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는 것(棄短錄長)이 인재를 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데,이렇게 하면 탐욕스런 사람이든 청렴한 사람이든 모두 부릴 수가 있습니다.  (강희맹,<시숙재집> )  
                                                                                                       -  강희맹이 장원급제 한 글이다.                          

강희맹,독조도,지본수묵,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이는 장점경영을 실천한 것인데 대표적인 사례로 조말생 사건이 있다. 이를 자세하게 소개한 책 "세종, 부패사건에 휘말리다"/ 서정민에 보면 세종이 어떻게 장점을 발휘하게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로는 가장 큰 죄에 해당하는 24명의 노비를 증여받은 것과 관련된 김도련 노비소송 사건으로 탄핵된 조말생을 병법과 군사에 대한 지식을 높이 사서 다시 복직시킨 것이다.


"조말생이 논어에 나오는 공자 제자 중에서 자로의 과감성과 자공의 달변을 겸한 인재"라 평하며 충성심과 성실함에서 뛰어나고 능수능란하게 일처리를 잘하는 조말생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그 결과로 조말생은 세종 15년 최윤덕이 서북면 일대의 이만주 일당을 성공적으로 토벌한 '파저가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 것이다.




세종의 싱크탱크 집현전의 비밀

'집현전에 물어보라'  세종시대의 인터넷 지식검색, 집현전

집현전은 오로지 경연을 위하여 두고 경연을 통해 세미나식 국정회의 수준 원했다.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전담하여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는 것이 집현전 학사들의 역할이다.  즉, 집현전의 역할로  이론과 실제를 동시에 겸하는 것을 중히 여겼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곧 지금 서 있는 좌표를 모르는 것과 같고, 또한 장차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함과 같다.

경서를 깊이 연구하는 것은 실용(實用)하기 위한 것이다. 경서와 사기를 궁구하여 다스리는 도리를 차례로 살펴보면, 나라 다스리는 일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워진다.


집현전, 조선 최고의 싱크탱크로 발전 가능했던 이유


조선 최고의 싱크탱크 '집현전'


첫째, 집현전 학사의 구성과 재임기간이 남달랐다.
 전공이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10년 이상 함께 지내면서 긴밀한 토론과 자연스런 교제를 거쳐 서로의 연구에 자극과 도움을 주고 받았다.
둘째, 집현전 학사들은 손쉽게 방대한 자료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집현전은 축적기억장치(ROM)와 임의접근 기억장치(RAM)가 탁월했는데 이는 국내외 문헌들의 총집결처였기에 가능했다. 방대한 자료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분류하는 나름의 방법이 개발되어 신속한 정보 습득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연구와 정책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었다. 연구한 보고서가 대부분 채택되기도 했다.
넷째, 집현전 학사들의 정치적 독립성을 들 수 있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스스로를 세종 개인의 연구집단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싱크탱크로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의 자취를 찾아 역사적으로 검증하고 그 사례에 대한 철저한 검토, 발생할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그리고 그에 대한 충분한 토론과 합의를 거친다면 분명 "대한민국의 집현전"이 만들어질 것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 "사람이 착한 바가 있으면 그 아름다움을 길이 자손에게 미치게 하고, 악한 사실이 있으면 그 미워함은 그 자신에 그치도록 한다." (善善長, 惡惡短) 하였다.                                                                                                 (세종실록 17/03/12)


인재검증장치와 인재보호

과거제도만으로는 적당한 인재를 뽑을 수 없음에 3명씩 천거하도록 하여 풍부한 인력풀을 가동했다.

1) 지모와 용력이 뛰어나서 가히 변방을 지킬만한 자 , 뛰어난 장수
2) 총명하여 가히 수령직에 대비할 수 있는 자 , 공정한 지방관
3) 사무에 능숙하고 두뇌가 명석하여 극히 번거로운 자리에 감당할 수 있는 자, 명석한 사무관

이 제도는 천거를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상벌이 주어졌기에 반응이 미미했다.  그러나 3년마다 인재를 추천하는 법제가 마련되었다.

3단계의 인재검증시스템

1) 이조의 낭관으로 하여금 매우 정밀하게 간택하였다. 경력과 자질, 그리고 부패혐의, 가족관계까지 살피게 하였다.
2)이조 내부의 관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재차 평론에 평론을 거듭했다.
3)이조 밖의 여론을 들어보는 중론 단계를 거쳤다.

사헌부 관리들의 원탁회의 '원의(圓議)'

사헌부 관리들은 풍헌이나 탄핵을 결정할 때, 그리고 배직된 자의 서경을 할 때 '원의'라고 하여 죽 둘러 앉아서 좌우를 물리치고 격렬하게 토론하곤 했다.( 세종실록 28/01/21)

집단지성 네트워크는 이미 세종의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Writer Profile
조연심  집단지성 네트워크 '더포티라운드 The 40 Round'

프로가 되게하는 아주 특별한 방법 M리더십, "여자, 아름다움을 넘어 세상의 중심에 서라" 출간. 지식소통 전문가로서 개인브랜드 구축을 위해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영향력, 그 중심이고 픈 로비스트랍니다. 
 www.mu-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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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8 월 31일 매주 월요일  총 15주에 걸쳐 세종에 관한  수많은 스토리들을 들을 수 있는 세종실록 아카데미가 문화1번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강사로는 매회차  특강으로 사회 저명인사 중에서 세종과 관련이 깊은 분들과 실록학교를 운영하고 계신 박현모 박사 (세종처럼 저)님이 매회 세종실록을 기본으로 15C  조선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예정이다.


세종의 리더십과 그의 인간성을 되짚어 보기 위해 시작된 세종실록 아카데미- 세종문화회관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쌓인 들판을 걸을 때라도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어지럽게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지금 내가 내딛는 발자국이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뒤따라오는 이에게는 길이 되나니

                      - 서산대사 -



" 영특하고 문명하면서도 과단성이 있으며 강의하고 신중하면서도 너그러우며 인자하고 공손하고 효성스럽다" 이는 세종의 성격 내지 인품에 대해 북한 사회과학원에서 세종실록에 나온 내용을 번역한 대목이다.  수성(守成)의 시기에 셋째 아들이었던 충녕을 세자로 임명하는 데 근본이 된 왕으로서의 인품을 한마디로 정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요즘 리더들이 본받고 따라야 할 품성의 모범 되겠다.

현 시대에 세종실록을 연구해 세종의 업적과 그의 리더십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세종전도사를 양성하고 계신 박현모 박사님



세종의 실제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으로 시작된 세종실록 아카데미...
우리가 세종이라고 알고 있는 이름은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 중 앞 두 자만 따온 것이고 실제 세종의 성은 이(李)요, 이름은 도(도: 복받을 도라는데 한자검색이 안 됨)이다. 어릴때 이름은 원정이라 한다. 1397년 세종이 태어났을 때는 아버지인 태종이 왕이 아니었으므로 궁궐이 아닌 지금의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근처(당시엔 한양의 준수방이었음)에서 태어났고 조선 건국 후 세대이며 진정한 '서울토박이'인 셈이다.

5월 15일 스승의 날의 유래에 대해 알고 있는가?
이는 1397년 음력 4월 10일생인 세종의 생일을 양력으로 풀어보니 5월 15일이라 해서 겨레의 스승인 세종탄신일을 기려 스승의 날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 숨겨진 스토리를 그 어느 누구도 알려준 사람이 없었다니 아쉽다... 학교 졸업한 지 어언 20년이 다 되가는데...

충녕 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자못 배우기를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외모가 빛나고 언어동작이 두루 예에 부합하였고.....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태종실록 18/06/03>

부왕이었던 태종의 세종에 대한 평가이다. 실로 부모가 자식을 이처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세종을 공부하면서 다시금 훌륭한 사람 뒤에는 그를 알아본 스승이 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데 태종이야말로 세종을 세종답게 만든 장본인 중의 으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가장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가 바로 '중용의 정신'이다. 이를 가장 잘 실천한 이가 바로 세종이다.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둘째아들 효령대군과 한 번 마시면 끝장을 보는 양녕대군 사이에서 적당히 마시고 중간에 그칠 줄 아는 충녕대군의 의지는 현대의 애주가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모습일 듯 하다. 즉 중도의 미덕과 자기 통제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흔히 세종하면 날렵하고 무술도 잘하고 늘씬할 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세종은 육식체질이라 고기가 아니면 수라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세종은 요즘 골프와 비슷한 격구를 즐겨했다. 과일로는 앵두를 좋아했고 전복도 좋아했다고 한다. 세종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지적이고 실리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서운 공부꾼"에다 "실무가적인 성격" 그리고 "예기에도 정통한"  다시 말하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왕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문무를 동시에 중히 여긴 왕이기도 하다.
강무란 조선시대의 국왕들이 직접 주관해서 사냥과 군사훈련을 겸하는 수렵대회인데 말 그대로 왕이 신하들과 작전 계획을 세워 군사들에게 무예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나라 곳곳을 친히 둘러볼 수 있었고 이동동선이 큰 왕 중의 한 분으로 기억된다.
경연이란 문신들과 함께 배우는 궁궐 안의 공부인데 신하들의 토론과정에서 그들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으면서도 간사한 신하들을 멀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강무와 경연을 모두 즐겨한 왕이 바로 대왕 세종인 것이다.

세종대왕의 왕비와 후궁 이야기를 살펴 볼까요?
이씨 왕조의 족보로서 역대 왕들의 왕위계승관계와 내외 자손을 모아 편집한 <선원보략>과  <조선왕조실록>을 기초로 살펴보면 약간 차이가 나긴 하지만 조선 왕조의 왕들의 왕비와 후궁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구 분

태조

정종

태종

세종

성종

연산군

광해군

숙종

영조

정조

선원보략

왕비

2

1

1

1

3

1

1

3

2

1

후궁

0

6

10

5

9

기록무

기록무

3

4

2

합계

2

7

11

6

12

.

.

6

6

3

왕조실록

왕비

2

1

1

1

3

1

1

3

2

1

후궁

6

6

10

8

11

14

10

8

4

4

합계

8

7

11

9

14

15

11

11

6

5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연산군의 여자가 가장 많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겠지요?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전국에서 1만 여명의 미녀를 모아 궁궐 안 7원 3각에 대기하게 하고 그 유명한 흥청악이라는 후궁집단을 만들기도 했다.  특기할 것은 연산군은 후궁들을 세 부류로 분류한 것이다.
1) 지과(地科): 아직 동침하지 않은 후궁
2) 천과(天科): 동침해서 만족을 준 후궁
3)반천과(半天科): 동침했으되 만족을 주지 못한 후궁
술과 여자 그리고 사냥을 즐겨했던 연산군은 결국 재위 12년만에 중종반정을 쫓겨나 강화도 유배지에서 3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세종이 사랑한 여자는 누구였을까?
신빈 김씨라는 여자인데 그녀는 원래 궁궐 내 사용 비품의 출납을 관장하는 내자시라는 관청의 여종이었다. 시어머니인 원경왕후와 며느리인 소헌왕후 모두를 잘 모시던 신빈 김씨는 세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1426년 "성은을 입게"되었고 이후  12년 동안 임신과 출산을 반복해 여섯 아들과 딸 둘을 낳게 된다.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는 자신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을 신빈 김씨에게 맡길 정도로 후궁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는데 세종은 왕비를 질투하지 말고 존경하라고 후궁을 가르쳤으며 불가사의하게도 서로 미워하지 않고 다복하게 살았다는 후문이다.
 

열공중인 세종실록 아카데미 1기생들과 박현모 박사님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나라가 복 받는다는 옛말이 있다. 

태종이 세종인 충녕을 선택한 이유를 보자.
첫째,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무인 가문'이었던 이미지를 벗고 지식인 사회를 이끌 지적 리더십을 겸비한 좋은 후계자의 모습인 것이다.
둘째, 정치의 대체를 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일머리를 안다는 것이다.
셋째, 외교능력이다. 오늘날에도 가장 중요한 역량 중의 하나인데 당시 일년에 2~3회가량 찾아오는 중국 사신을 맞이해야 했던 조정으로서는 적당한 주량과 주법을 갖춘 외교능력을 가진 세자가 절실했던 것이다.
넷째, 안정적 왕위계승자의 존재이다. 한 시대만이 아닌 후대까지도 정책이 계승되고 왕조가 번창하게 할 주역으로 세종을 주목한 것이다.

우리가 나라의 리더나 조직의 리더를 선발할 때 한가지 면만 보고 정할 게 아니라 다각도로 점검해보아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훌륭한 리더를 가려낼 수 있고 그런 훌륭한 리더라야 나라와 조직이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 소유한 것을 어떻게 다루느냐다"


이 말에는 우리가 세종의 리더십을 배우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배워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리더십을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나를 다스리는 제일의 덕목이 바로 리더십이 아닌가 싶다. 가정과 조직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 나부터 건사하는 미덕이 필요한 때이다.

본강의보다 많은 인연을 만드는 뒷풀이...- 백승휴,조연심,방미영,신철식,박현모박사,유영숙 등(좌로부터)


다음 주 강의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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